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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양주 소놀이굿 김인기옹|소값흥정 구성진 원마부 4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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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소놀이굿은 소를 주제로 한 굿이요, 여흥의 놀이다. 한국에 있어 소는 결코 신격화된 가축은 아니다. 인도 힌두교도들처럼 신성시하여 도살과 육식을 엄금하거나 수단·에티오피아 등 동아프리카의 목축부족처럼 혼인 예물(혼자)로 많은 소를 몰고 다니는 처지도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에선 소를 신물로 모시지는 않지만 때때로 인격화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즉 한국인만큼 소를 가족처럼 여기고 묘한 애정을 느끼는 민족도 드물 것 같다. 그야말로 오랜 농경민족으로서의 견습이다.
『농가에선 소가 곧 상전이었죠. 요즘은 경운기 시대가 돼서 실감이 안나게 됐지만 서두 마차 끌 시절엔 소 치장을 좀했나요? 굴레타령에도 명주8사12경에 백통장석 광못 박아 솔상모 물려 놓는다는 노래가 있듯 서로 시새워 풍경을 아래위로 3개씩 달고 장관이었죠.
소가 농사를 다 지어줬으니깐두루 사람이 소에 꼭 매달려야 했던 거죠.』
중요무형문화재 70호 양주소놀이굿의 원마부로 지정된 김인기씨(74)는 양주구읍 인근의 백석 방성에서 태어나 거기서 한평생 농사에 매달려 살아온 한낱 농군이다. 그는 농사밖에 모르는 까닭에 소놀이굿에 심취해 있는지 모른다.

<시월상달의 종사굿>
불곡산 밑으로 펼쳐진 10리 들판이 골논(개흙같은 수렁논)이어서 별로 물 걱정없이 벼농사가 잘 되던 고장이란다. 이런 농촌이므로 가을걷이가 끝나면 저절로 흥겹고 그 땅에 서 자손 번창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부락마다 부농이 주로 한상 차려줘 굿판이 벌어졌었다.
말하자면 소놀이굿은 시월상달의 고사요, 경사굿이다. 축귀굿이나 누환굿과 같은 일반적인 굿의 통법과는 전혀 다른 점이 그 것이다.
소놀이굿은 집안의 안녕과 수명장수와 재물풍성을 비는 제석거리(무당의 안택굿)에 잇대어 벌이는 연희성 짙은 놀이굿이다. 소놀이굿이라는 말대신 「소굿」혹은 「마부타령굿」으로 불리듯이 무당과 마부가 소를 주제로 하여 덕담과 타령을 주고받는데 여기서는 원마부가 주역 구실을 한다.
소의 시늉은 두 사람이 멍석을 함께 뒤집어쓰고 고무래로 머리를 만들어 쥐고 춤춘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여러 동작을 보이지만 주역으로서 가장무를 행하기보다 조역이요, 무대의 소도구 구실에 불과하다. 곧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살피는 마부의 연재로 굿이 구성돼 있는 셈이다.
우걱뿔이면 자빡뿔
별 박힌 노구뿔
쌍쌍 을러서 사족뿔
둘둘 말아 방석뿔
우로 뻗은건 천지각
옆으로 뻗은건 비녀뿔
흑각 비녀는 물소뿔이요
개천 바닥에 새우뿔
오뉴월 염천에 모깃불
정월보름엔 횃불인데
어떤 뿔 찾으시오.

<「뿔내력」타령 25종>
마부가 부르는 「뿔내력」타령이다. 이같은 노래는 소를 끄는 마부의 노정기를 비롯하여 소의 짐바리 보물, 쇠머리·귀·눈·입·이·혀·꼬리·다리·굽에 관한 갖가지 내력과 굴레치장·길마치장·말뚝치장·마부치장·부인치장·집치장·종자타령 등 소리 대목이 무려 25종이나 된다. 이들 대부분의 소리는 사실상 무가와 밀접한 관계가 없는 재담이요, 익살이다. 걸쭉한 큰 굿무당을 만나면 새벽까지 날 밝는 줄 모르고 끝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스무살 때쯤인가, 농악패나 따라다니고 소굿이나 보러 다닌다고 아버님한테 몹시 야단맞고 원산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지요. 달포간이나 견디다가 돌아와선 다신 외지에 나가질 않았지요. 1청2조라 내가 청이 좋으니까 소굿 잘하시던 김한선·정윤남 같은 분들이 자꾸 부추겨주어 자연 신바람은 나죠. 그래 30세부터는 아주 나서버렸어요.』
김씨의 기억으로는 양주의 잡다한 마부타령이 정윤남의 그루터기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했다. 정씨는 40년전에 작고했지만 그때 창호지에다 기름 먹인 노래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정씨는 농군에 불과하지만 선소리(상두소리와 달구소리)가 일품이었고 화려한 건달차림으로 쇠전(우전)에도 나가면서 한가락 하는 분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우용신·김인기 등 후진이 길러졌다는 증언이다.
소놀이굿은 양주일대에만 전승되는 독특한 것이고 가사 역시 세련된 내용임에 틀림없다. 물론 과거의 분포를 보면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에 걸쳐있었으나 대개 소멸상태다.
그나마 양주에 남을 수 있었던 연유도 실은 양주별산대와의 유기적인 뒷받침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과 가까운 듯 하면서도 짐짓 외지게 돌아앉아 구습을 지켜온 양주사람들의 기질말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과 소의 관계는 1만5천년전 라스코와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은 야생종 원우에 속하는 것들이다. 또 중동지역에서는 BC6500년께 우마를 사육하며 보리를 재배했고, 중국의 경우에도 5천년전 앙소문화기에 이미 가축화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선 아직 고고학적인 해명이 없으므로 소에 대한 역사를 상고할 수 없지만 적어도 2천년은 헤아리지 않을까.
소에 관한 여러 가지 설화는 고사하고라도 신라의 지증왕이 농사에 우경법을 장려했고 고려시대엔 목우장 설치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종우를 관리했고 우역치료에 관한 저술이 괄목할만하다.
어느 모로 보나 한국의 풍토에서는 소한테 각별한 애착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처럼 우유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고, 크리슈나신이 목동으로 화신했다든가, 소의 도움으로 지옥을 벗어날 수있다고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농촌에서는 한결같이 말(마)보다 소를 취했다. 소에 비하면 말은 너무도 쓸모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농경사에 뿌리>
외국인들은 한민족의 소에 대한 애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외양간이 인가안에 마련된 점이라든가, 여름날 들녘에서 한 마리씩 풀을 뜯고 있는 풍경, 혹은 황소를 걸고 씨름대회를 하는 습속 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사회사·풍속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래의 양화도입기에 소가 한국인의 상징처럼 등장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분석됨직하다.
한국의 소는 단순히 농사짓고 짐나르는 사역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한국에서 가죽이라면 단연 우피가 대표한다. 조선시대에는 사사로이 우피를 판매하는 자는 엄하게 다스려 통제했다. 쇠털은 모아 전립과 담요를 만들고 쇠꼬리털도 말총처럼 갓대우와 쳇불 짜는데 이용했다. 길고 실한 황소뿔로 각궁을 만든다든지 각배로 사용했던 것은 북방민족다운 유습이며 그밖에 뿔을 이용해 화각공예를 발전시킨 점과 골재의 갖가지 이용법 등 뭣하나 안 버리고 활용했던 알뜰한 살림살이의 슬기를 엿보게 한다.
쇠똥을 채독같은 기물의 벽면에 바르는 도장법은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있는 예지만 대형의 제철시설에서 쇠똥을 디딜풀무의 방풍·윤활제로 사용했던 것은 결코 흔한 사례가 아니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음식으로도 불고기·갈비·곱창·족탕·도가니탕이며 육회·간처녑에 선지국·수구레 등 굽고 국 끓이고 날로 먹는 방법이 대충 헤아려도 20가지가 넘는다. 한국의 소는 정말 살아서도 소요, 죽어서도 소다. 그 이상 더 무엇을 공헌하랴.
여보 만신 들어보오
말뚝 내력 아뢰리다
십리 밖에 시무나무
십리안에는 오리나무
한다리 절뚝 전나무냐
마주 섰다 은행나무
입을 맞춰 쪽나무냐
아흔아홉에 백자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무안 당해 피나무
발발 떨어 사시나무
오줌 누어 소태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냐
사시장철 소나무
이나무 저나무 다 제쳐놓고
원산 말뚝 대령하오.
소 흥정하는 대목의 말뚝타령이다. 원산 말뚝이란 콩을 말(두)에 가득 담고 그 위에 꽂아놓은 마른 명태. 곧 원산북어다. 그 북어 말뚝에다 명주끈으로 된 쇠고삐를 걸고 무당이 집주인을 불러내 소값을 치르게 한다. 그래서 소흥정은 소놀이굿 가운데 중요한 대목이다. 여기서 한 밑천을 거둬들여야 성주풀이와 축원이 잘 풀리기 때문이다.

<"회관짓는게 소망">
한국에서 소를 보는 척도는 다소 색다른 요소로 가늠한다. 흡사 사람의 성질에 비견된다는 지론이다. 행티 나쁜 거센 소는 받치기를 잘하고 힘겨우면 왜장쳐서 꾀를 부리는 까닭에 몸이 마른다. 반면에 순한 소는 부릴때 말을 잘 듣거니와 자연히 살찌고 몸이 반듯해서 내다 팔기 아까와 정을 주게 된다. 잘 생긴 소라야 역시 순하다고 한다.
잘 키운 소라야 몸판이 고르고 사대가 반듯하다. 욱은 것은 그만큼 못 얻어먹고 자란 탓이다. 어깨는 떡 벌어져야하고 엉덩판이 살쪄야 우전에서 칭찬받는다. 뿔 사이가 넓은 것이 순하다는 게 통설이고, 코는 제때에 뚫어 향나무 코뚜레로 잘 메야 우선 보기부터 좋다. 앞무릎이 뭉툭해야 행보가 꿋꿋하고, 쭉 뻗은 밀발보다 아굿하게 오므라진 발굽이 훨씬 힘쩍다는 것이다.
어려운 주문 같지만 실은 재래 한우의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일컫는 특징들이다.
김씨는 이제 더도 말고 회관한 채 짓는 게 최대의 소망이다.
젊어서야 손가락질을 등뒤로 돌려 모름새 할 수 있었지만 며느리·손자와 함께 살면서 1년에 몇 차례씩 집안에서 온통 뚱땅거리기란 영 거북해진 탓이다.
아니 괴로움의 하소연이다. 취재기자를 만난 김에 무슨 수가 없겠느냐 통사정이다. 국가적인 지정조치와 순박한 사람들의 사생활 침해와의 상반된 희비가 엉End한데서 새로운 문제점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글 이종석(중앙일보호암갤러리관장·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장충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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