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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만 치열했던 열일곱의 성장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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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호 30면

영화 ‘레이디 버드’

‘질풍노도 17세 소녀의 성장기.’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성장 영화의 뻔하디 뻔한 플롯이 떠오를 법도 하다. 시골 소녀가 고향을 벗어나 뉴욕커가 되고 싶어한다는 줄거리에서도 대단한 서사구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화는 반짝반짝 빛난다. 때론 웃기고, 때론 사랑스럽다. 그레타 거윅 감독의 세밀한 관찰력이 평범한 모든 것에 숨결을 불어넣은 덕이다.

거윅은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올리며 배우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재키(2017)’ ‘매기스 플랜(2017)’ 등에 출연하며 주류 무대에서도 주목받고 있던 차였다. 그런 그가 ‘레이디 버드’를 통해 배우에서 감독으로 멋진 데뷔를 했다. 올해 영국 아카데미에서 감독상, 각본상, 작품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며(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신예 여성 감독으로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아카데미 역사상 감독상 후보에 오른 다섯 번째 여성이었으며, 데뷔작으로는 최초였다.

영화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나서 뉴욕커가 되고 싶어하는, 고등학교 졸업반인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의 1년을 그린다.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러달라고 요구한다. 이 레이디 버드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거부하고, 자신이 정한 대로 살기를 원하는 당돌한 소녀다. 꿈 많고, 자아가 강한 소녀는 사사건건 엄마와 다툰다. 엄마는 딸에게 시종일관 걱정 반 진심 반이 담긴 ‘팩트 폭격’을 날린다. 뉴욕으로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레이디 버드에게 “니 주제에 무슨, 주립대도 감지덕지”라고 말하는가 하면, 딸과 함께 파티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러 가서는 “파스타 한 접시만 먹으랬지” “너무 핑크야”라는 촌철살인의 경구를 날린다.

시놉시스상에서 오랫동안 영화의 가제가 ‘엄마와 딸’이었던 데서 볼 수 있듯, 감독은 십대 소녀의 성장기의 중심에 첫사랑 소년 대신 엄마를 둔다. 세상 둘 밖에 없는 듯 친하게 지내다가도 삽시간에 싸우고 마는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엄마와 딸의 ‘사랑과 전쟁’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공통 주제인 듯해 웃음이 절로 난다.

레이디 버드는 엄마를 포함해 동성 친구, 이성 친구와 갈등을 일으키고 다시 화해하며 졸업반 생활 1년을 보낸다. 극본을 쓴 감독은 이 일상을 대단히 세밀하게 포착하며 레이디 버드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거윅은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성은 청소년 시절 각자의 어머니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고 했다”며 “그 모녀 관계를 영화의 중심에 두고 싶었고, 어머니와 딸 사이의 로맨스가 가장 격정적인 로맨스 중 하나인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여-여’ 갈등에는 세대 차이도 한 몫한다. 레이디 버드와 엄마 매리언(로리 멧칼프)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며 자랐다. 1980년대에 태어난 레이디 버드는 무엇이든 꿈꿔도 되는 시절을 살았고, 이는 전후 세대인 엄마 매리언의 경험과는 분명 다른 삶이다. 매리언이 레이디 버드에게 “너만 생각한다”고 타박하고, 레이디 버드는 “세상에 전쟁보다 슬픈 게 많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거윅은 “세대 차이라는 게 모녀 관계에 얼마나 큰 갈등을 유발하는지 간과하는 것 같다”며 소회를 밝혔다.

‘질풍노도 17세 소녀의 성장기’인 이 영화는 다시 말해 부모가 구축한 세상을 깨고 나오려는, 마침내 깨고 나온 작은 새의 이야기다. 레이디 버드는 마침내 뉴욕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며 고향을 떠난다. 그녀는 성장기의 마침표를 찍게 된 걸까. 영화는 뉴욕의 길거리를 묵묵히 걸어가는 크리스틴을 보여주며 끝난다. 그 길 위에서 숱한 여정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평범하지만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감독: 그레타 거윅
주연: 시얼샤 로넌
등급: 15세 관람가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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