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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식 하기 나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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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호 34면

김하나의 만다꼬

나보다 열 살쯤 어린 삼십대 초반의 내 친구는 전문직 여성이다. 이 친구의 모토는 ‘무리할 수 있을 때 무리한다’다. 뭐든지 참 열심히 하는 친구라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성취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베를린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한국에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뚜렷한 목적 없이 커다란 가방을 꾸려 떠났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무척 행복했다. 자전거를 타고, 독일어를 배우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그곳 친구들과 파티를 하고, 숲을 산책했다. ‘무리할 수 있을 때 무리해 가며’ 목적을 좇기에 바빴던 한국에서와 달리 충분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주어지자, 비로소 그녀는 인생 전반에 대해 찬찬히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자리를 구해 독일에서 살 수도 있을까? 하는 모색을 하던 차에 나를 만난 그녀는 이런 얘기를 했다. 아버지가 “네가 독일에 머물 거라면 한국에서의 전문 분야를 살려 독일과 한국 간의 가교 역할을 하거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거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고 늘 아버지 말씀을 잘 따랐는데, 이번에는 그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서 고민이 된다고 했다.

내가 대답했다. “뭘 고민해요. 아버지한테 ‘네’라고 하세요. 그리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OO씨 지금 나이가 서른이 넘었죠? 서른 넘어서까지 부모 말씀 잘 듣는 거 아니에요. 그 말씀 들었다가 내가 불행해지면 부모를 원망하게 되잖아요. 내 인생 망해도 내가 선택해서 망해야 후회가 없죠. 부모님이 나 대신 살아주실 거 아니니까. 부모 말씀 잘 듣기만 하는 건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부모한테 떠넘기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부모님은 OO씨 잘 되라고, 걱정하는 마음에 하시는 말씀이니 그 마음 알겠다는 뜻으로 ‘네’ 하세요. 그리고 잘 생각해서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 친구는 독일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지금은 다시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만난 그녀는 그때의 일을 언급하며 고마웠다고 했다. 좀 더 여유를 갖고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고.

나보다 세 살 많은 사십대 중반의 친구는 남자 친구와 몇 년째 동거중이다. 이 친구는 앞서 말한 친구와는 반대로 어릴 적부터 부모 말을 지지리도 안 들었다. 결혼하라는 부모님 말씀을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사십대에 만난 남자친구와 같이 사는 걸 부모님이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워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혼자 평생 외롭게 살까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남자친구가 있어 마음이 낫다고. 가끔 부모님, 남자친구와 다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지만 명절에는 각자의 집에만 간다. 그 친구와 나는 농담조로 이런 말을 한다. ‘부모 교육은 자식 하기 나름이라니까.’

어느 부모든 자식이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을까. 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다른 시대를 살고 다른 가치관을 갖는다. 어릴 적에야 부모가 자식을 교육하는 게 당연하다. 태어나 혼자서는 뒤집지도 못할 적부터 지켜봐 온 부모 눈에는 자식이 언제나 보살피고 가르쳐줘야 할 존재처럼 보이리라.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자식이 부모에게 가르쳐 드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식은 절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을. 세상 모든 성인 대 성인의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둘 때 건강해지는 법이니까. ●

김하나

브랜드라이터.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자.『 힘 빼기의 기술』을 쓴 뒤 수필가로도 불린다. 고양이 넷, 사람 하나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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