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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헬렌켈러' 시청각장애인 1만명…'설리반 선생'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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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3일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모인 시청각장애인들이 촉수화 등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고 있다. 일주일마다 자조모임 식으로 모이는 이 시간이 사실상 유일한 소통의 기회다. 최승식 기자

13일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모인 시청각장애인들이 촉수화 등을 이용해서 대화를 하고 있다. 일주일마다 자조모임 식으로 모이는 이 시간이 사실상 유일한 소통의 기회다. 최승식 기자

양손을 맞잡고 뺨에 갖다 댄다. 점자정보단말기(문자와 점자를 서로 변환해서 읽게 해주는 휴대용 장치)로 뭔가를 주고받는다. 손바닥에 천천히 글자를 쓴다. 13일 서울 동작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회의실.

"이거 써보니 좋아요. 한 번 써보시죠."(김용재(48)씨) 

"저는 제대로 된 게 없는데 어떻게 하나요."(김모(49ㆍ여)씨)

김용재 씨가 일주일 만에 만난 김모 씨에게 점자정보단말기(한소네)를 추천한다. 이 간단한 대화를 하는데 약 5분 걸렸다. 촉각을 이용한 수화, 즉 촉수화다. 평소 무표정한 두 사람은 이 시간만큼 미소 짓고 눈웃음을 짓는다. 두 사람 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시청각장애인이다. 서로 만지고 단말기를 활용하고 손바닥 필담을 섞어서 무언의 대화를 했다. 이들의 대화는 촉수화 통역 자원봉사자인 최인옥(72·여·청각장애인)씨가 맡았다.

시청각장애인 이철성씨(왼쪽)와 촉수화 통역 자원봉사자인 최인옥씨가 손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최승식 기자

시청각장애인 이철성씨(왼쪽)와 촉수화 통역 자원봉사자인 최인옥씨가 손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최승식 기자

이날 회의실에는 시청각장애인 4명이 모였다. 일주일 만에 만나서 안부를 묻고 촉수화와 수화, 점자를 익힌다. 시청각장애인의 대부분은 말을 못한다. 이들의 삶이 궁금했지만 대화를 할 길이 없었다. 비장애인과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 곁에서 거동을 돕는 활동보조인도 손바닥 필담이 유일한 소통 수단이다. 오른쪽 귀에 약간의 청력이 남은 이철성(52)씨에게 "일주일 만에 만나서 대화하니까 좋으시냐"고 몇 번 물었더니 "네"라고 답한다.

시각·청각 모두 잃어 가장 심각한 장애 #유일 소통법, 촉각 활용 '무언의 대화' #공식 통계도 없어, 특화된 지원 전무 #빈곤에 글도 몰라…"관심 가져주세요"

오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이날에도 시청각장애인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중의 사각지대다.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바깥 활동도 어려워서 가장 심각한 장애로 꼽힌다. 헬렌 켈러(1880~1968)가 대표적인 시청각장애인이다. 한국에서는 헬렌 켈러는 잘 알지만, 시청각장애인은 거의 모른다.

입(말) 대신 손(촉수화)으로 대화를 나누는 시청각장애인과 활동보조인. [사진 한국장애인개발원]

입(말) 대신 손(촉수화)으로 대화를 나누는 시청각장애인과 활동보조인. [사진 한국장애인개발원]

헬렌 켈러(왼쪽)와 스승인 앤 설리반. [중앙포토]

헬렌 켈러(왼쪽)와 스승인 앤 설리반. [중앙포토]

안내견 '평등이'와 함께 있던 조원석(25)씨도 시청각장애인이다. 6살 때 뇌수막염에 걸린 뒤 갑자기 장애가 다가왔다. 조씨는 시각과 청각 기능을 거의 잃었지만 말은 자유롭게 한다.

"사람들이 헬렌 켈러는 아는데 우리 이웃에 헬렌 켈러가 있는지는 모르는 거 같아요. 우리가 헬렌 켈러처럼 성장할 수 있는지는 주변에서 설리반처럼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달렸습니다." 

장애인복지법에 명시된 장애의 종류에는 시각·청각·지체 등 15가지가 있다. 시청각 장애인은 없다. 이 법뿐만 아니라 정부 제도 어디에도 없다. 편의상 시청각장애인, 시청각중복장애인, 맹농인, 농맹인 등으로 불린다. 협회도 없어서 권익을 대변할 데가 없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공식 통계는 전무하다. 5000~1만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정부가 조사한 적도 없다. 특화된 복지서비스와 정책도 거의 없다. 촉수화를 할 수 있는 비장애인 전문가가 10명이 채 안 된다. 미국이 70년대 헬렌켈러국립센터를 만들고, 일본은 91년 전국맹농인협회 설립하고 2013년 실태조사를 했다.

이들은 다른 장애인보다 더 심한 차별과 편견에 시달린다. 김모 씨의 활동보조인 송모 씨는 "김씨가 상점 물건을 만져보면서 고르는데 점원이 '가라'고 짜증을 낼 때가 많다. 헬스장에서는 ‘장애인이 운동해서 뭐 할 거냐’ 식의 비하가 이어진다"고 털어놨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시청각장애인은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날 모임 참석자 3명이 기초생활수급자다. 기초 수급을 받지 않으면 활동보조인을 쓰기 어렵다. 점자정보단말기(한소네)도 500만~600만원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집이나 장애인시설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문자도 모른다. 서해정 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은 "장애인 시설에서 만난 50대 남성은 어렸을 때 버려진 뒤로 글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화장실 가고 싶다는 식의 의사 표현이 다 '바디 랭귀지' 수준이다"면서 "시설에 머무르는 시청각장애인이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경우보다 더 취약하다"고 말했다.

시청각장애인이 서로 점자를 가르쳐주고 배우는 모습. [사진 한국장애인개발원]

시청각장애인이 서로 점자를 가르쳐주고 배우는 모습. [사진 한국장애인개발원]

다른 장애인과 비교해도 삶의 질은 크게 떨어진다. 지난해 한국장애인개발원 연구에 따르면 거의 매일 외출한다는 비율은 장애인 평균이 67.3%인 반면 시청각장애인은 14.9%에 그쳤다. 최근 2년 내 건강검진을 받지 않은 비율도 시청각장애인(50.9%)이 장애인 평균(27.1%)의 두 배에 가까웠다.

서 부연구위원은 "시청각장애인에게 절실한 의사소통ㆍ이동 지원 서비스가 우선 지원돼야 한다. 특히 선천적 장애를 지닌 아이들부터라도 제대로 된 촉수화ㆍ점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시청각장애인의 유일한 대화법 '촉수화'

촉수화를 하는 모습. 최승식 기자

촉수화를 하는 모습. 최승식 기자

촉수화는 촉각을 활용한 수화를 의미한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시청각장애인들이 또다른 감각인 촉각을 활용해서 소통하는 대화법이다. 다만 '일대다' 식으로 소통이 가능한 수화와 달리 촉수화는 반드시 '일대일'로만 할 수 있다. 또한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선 촉수화 체계가 정립되지 않아서 단어나 표현 등이 사람마다 다른 편이다. 촉수화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전문가도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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