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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화학무기 응징’ 1년 만에 … 지중해에 미 구축함 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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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70명 숨진 시리아 사태 강력 대응 

지난 7일(현지시간) 시리아 정부군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격을 당한 동구타 두마 지역 어린이들이 산소호흡기로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 이 공격으로 70여 명이 숨지고 50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은 8일 반군 민간구조대 ‘화이트 헬멧’ 측이 공개한 것이다. [AP=연합뉴스]

지난 7일(현지시간) 시리아 정부군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격을 당한 동구타 두마 지역 어린이들이 산소호흡기로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 이 공격으로 70여 명이 숨지고 50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은 8일 반군 민간구조대 ‘화이트 헬멧’ 측이 공개한 것이다. [AP=연합뉴스]

“(시리아 화학무기 민간인 살상 의혹은) 인류에 대한 끔찍한 모욕이다. 레드라인과 많고 많은 선을 넘은 것이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에 의한 이러한 악랄한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2017년 4월 5일 백악관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목도한 이러한 잔혹 행위를 그냥 놔둘 수 없다. (화학무기 공격의 주체가) 러시아인지, 시리아인지, 이란인지, 혹은 모두가 함께한 것인지 알아낼 것이다. (책임 있는) 모두가 대가를 치를 것이다.”(2018년 4월 9일 백악관 군 지휘관 회의 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화학 무기 응징’ 결의가 꼭 1년만에 반복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타격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지중해 해상의 미 해군 구축함에 긴장이 감돌고 있다. 지난 7일 시리아 반군 지역인 동구타 두마에서 사린가스나 염소가스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격을 받아 어린이 등 민간인 70여 명이 숨진 데 대한 응징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미 “잔혹행위 그냥 못 둬 … 중대결정”

트럼프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각료회의에서 “우리는 상황을 조사하고 있고 군 수뇌부와 논의하고 있다”며 “군사적 옵션이 많다. 앞으로 24~48시간 이내에 중대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군사적 대응을 콕 집어 묻자 “모든 것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다”고 답했다.

상황은 여러 모로 ‘데자뷰’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주 칸셰이칸 지역에서 아사드 정부군의 화학무기 공격으로 80여명이 숨진 지 사흘 만인 4월 6일 시리아 알샤이라트 공군기지 공습을 감행했다. AP통신은 “당시 공습에 동원됐던 토마호크 미사일을 장착한 구축함 도널드 쿡이 트럼프의 명령만 떨어지면 작전 수행 가능하도록 지중해에서 대기 중”이라고 이날 전했다. 지난해 작전에 사용됐던 구축함 포터도 시리아에 며칠 내로 도착할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국방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눈에 띄는 것은 트럼프가 시리아 사태에서 아사드 정권의 최대 후원자인 러시아와 이란의 공동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아마도 그럴 것인데, 만약 책임이 있다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이다.

시리아 화학무기 사용 파장

시리아 화학무기 사용 파장

러시아·이란 공동 책임론도 제기

러시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해엔 화학무기 공격 주체가 시리아 정부군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면 이번엔 화학무기 사용 자체를 부인하는 분위기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우리 군사 전문가들이 해당 지역을 방문했지만, 염소가스나 다른 화학물질이 민간인에게 사용됐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이날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미국과 러시아는 정면 충돌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시리아군을 지원하는 러시아가 손에 시리아 아이들의 피를 묻혔다”며 “유엔 안보리가 행동하든 않든 미국은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실리 네벤쟈 유엔주재 러시아 대사는 “날조된 구실 아래 군사력을 사용한다면 중대한 파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화학무기 공격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앞서 러시아 국영매체는 이날 새벽 시리아 중부 홈스주에 있는 T-4 공군기지를 공습한 주체가 이스라엘군 F-15 전투기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이란 병력을 포함해 최소 14명이 사망한 폭격에 앞서 이스라엘은 미국에 관련 계획을 사전 통보했지만, 러시아는 미리 통보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의 강력한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에 대한 군사 옵션에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미국으로선 1년 만의 공습이 지난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트럼프 정부 내에선 이번 사태를 적당히 넘겼다간 핵 협상을 앞두고 있는 이란 과 북한에 미국이 앝보일 수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지난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만찬 도중 내려진 알샤이라트 공습 명령은 중국과 북한에 대북 군사옵션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는 효과를 낸 바 있다.

러 “민간인에게 사용 증거 없다” 

정작 알샤이라트 공습은 시리아 내전 상황을 뒤바꾸진 못했다. 외려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은 이슬람국가(IS) 격퇴 기세를 몰아 반군 장악 지역의 90% 이상을 확보해 승전을 자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조차 수일 전 “중동 문제로 지금까지 7조 달러를 낭비했다”며 “시리아에서 곧 철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이 시리아에 대한 개입 목소리를 다시 내는 것은 ‘시리아 내전 이후’가 러시아와 이란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게 하려는 경고 성격이 짙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 러시아 관계는 수십년만에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양측은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 논란에 이어 영국 거주 러시아 이중스파이 부녀 독극물 공격에 따른 외교관 맞추방 등으로 대립 수위를 높여왔다.

다만 사태가 미국과 러시아의 군사충돌로 치닫지는 않을 전망이다. NYT는 현재로선 미국이 러시아에 대응해서 병력을 사용할 생각이 없다고 고위 관료를 인용해 보도했다. 대신 “러시아에 대한 더 강한 경제 제재나 외교적 고립이 논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시리아 문제는 이날 공식 업무를 시작한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의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대북 문제 등에서 초강경 매파로 분류되는 볼턴 보좌관은 이날 별다른 언급 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 발언을 하는 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볼턴은 버락 오바마 정권 땐 시리아전 개입에 반대했지만 지난해 공습 땐 “트럼프가 옳다”면서 찬성 의사를 밝힌 바 있다.

강혜란 기자, 런던=김성탁 특파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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