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봄여름가을겨울' 김기덕 감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이 영화는 잠시 쉬어가는 휴식같은 영화입니다. 보다가 잠깐 자더라도 다 본 거나 다름없습니다."

19일 개봉하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김기덕(43.사진) 감독은 첫 시사회에서 다소 뜻밖의 무대 인사를 했다. 데뷔작 '악어'부터 최근작 '나쁜 남자''해안선'등 전작을 비춰볼 때 확실히 '봄여름가을겨울…'은 "김기덕이 변했다"라는 반응을 이끌어낼 만하다.

그간 그의 영화들을 묘사한 단어들은 주로 엽기.파괴.극단이나 심하게는 여성 비하였다. '섬''수취인불명'등이 해외 영화제에서 각광을 받았음에도 국내 평단은 이런 연유로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데 인색했다. '나쁜 남자'를 제외하고는 상업적 성공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이번엔 '휴식'이다. 외딴 산 속의 암자를 무대로 한 이 영화는 그의 말처럼 물 흘러가는 듯 하다. 눈이 시릴 듯한 아름다운 사계를 화선지 삼아 동자승이 소년기-중년기-노년기를 거쳐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나간다. '봄'에서 동자승은 살생을 배우고, '여름'에서 소년은 암자로 요양하러 온 소녀로 인해 욕망에 눈을 뜨게 된다. 소년은 속세로 뛰쳐나가지만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바람난 아내를 죽인 뒤 암자로 돌아오는 '가을', 마음을 비워내고 평화를 구하는 '겨울'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삶이 계속되듯 또다시 봄이 돌아온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제56회 로카르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을 받았으며 독일 판도라 필름과 공동제작했다. 유럽 영화 시장의 주축으로 꼽히는 바바리안 필름이 유럽 쪽 배급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영화가 순해졌다.

"변했다기보다 나무의 몸통은 그대로인데 푸른 잎이 단풍이 되고 또 낙엽이 되는 것으로 이해해줬으면 한다. 그동안의 '김기덕 영화'가 클로즈업이라면 이번 작품은 롱 쇼트다. 흔히 내 영화를 말할 때 위악.집착.도피.파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나라고 고민이 없었겠는가. 지적인 대화보다 욕망에 바탕한 폭력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내 스스로도 답답했던 것 같다. "

-신작을 통해 하고싶었던 얘기는.

"계절에 따른 다섯개의 에피소드는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영화를 보면 미완성이다. 누군가의 삶으로 구경할 것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이 영화는 1백%가 된다. 자학과 가학의 끝없는 고리에서 왜 인간이 빠져나오지 못할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 바란다."

-순제작비가 10억원인데 영화 속 암자를 3억원이나 들여 지은 까닭은.

"암자를 찾아 사방을 다녔지만 마땅한 데를 찾지 못하다 경북 청송군 주왕산 국립공원을 보고 세트를 짓기로 결심했다. 암자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출연자였다. 3억원은 말하자면 배우의 출연료였다. 환경부 허가도 쉽지 않았고 환경단체의 반발도 거셌다. 물 위에 30t이나 나가는 암자를 띄우는 건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불상과 나룻배, 사슴상.맷돌.탱화 등도 암자 못지 않은 '배우'였다. 불상이나 탱화는 불교 미술하는 사람에게 부탁해 국보급 미술품을 재현한 것이다. 눈여겨 봐주시길."

-아내를 죽이고 돌아온 남자(김영민)가 노스님(오영수)의 명을 받아 살인을 저지른 바로 그 칼로 마룻바닥에 반야심경을 새기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범인을 잡으러 내려온 형사들은 남자가 반야심경을 파고 지쳐 쓰러지자 점퍼를 덮어준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그런 형사가 어디 있느냐고 그런다. 그러나 나는 반야심경을 파며 속죄를 하겠다는 마음을 무시하고 수갑 채워 간다는 게 더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봄여름 …'에서 직접 출연했다. 대사 한마디 없이 맷돌을 끌고 산 위를 올라가는 수행으로 채워졌는데.

"원래 그 역은 안성기씨나 도올 김용옥 교수가 했으면 바랐다. 안성기씨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도올은 연락이 되지 않아서 못했다. 대사를 넣는 대신 얼음 불상 조각이나 맷돌 끌기 등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택했다. 출연료? 2백만원 받았다. 영하 30도에서 너무 고생해서 찍은 거라 달라고 했다.(웃음)"

글=기선민, 사진=임현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