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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다 진한 충절…388년 17대를 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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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5일은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이다. 13억 중국인들은 청명절 연휴를 전후해 조상의 묘나 충신ㆍ열사의 사당을 찾아 참배한다. 한국에서 청명과 날짜가 겹치는 한식에 성묘하는 것보다 더 정성껏 전통을 지킨다.

 원숭환 장군 영정

원숭환 장군 영정

지난달 31일 베이징 한복판인 광취먼(廣渠門)의 작은 공원 한 켠에 삼삼오오 참배객들이 모여들었다. 명(明)나라 말기의 충신 원숭환(袁崇煥ㆍ1584∼1630)장군의 묘에 헌화하고 사당에 참배하는 추모객들이었다. 원 장군은 후금의 침략에 맞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적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극형을 당했다. 전투로는 원숭환을 이길 수 없었던 홍타이지(청 태종)의 모략이었다. 먼 훗날 그의 누명이 풀렸고 지금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충절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됐다.

명말 충신 원숭환 장군의 묘. 뒤에 보이는 작은 묘는 원숭환의 신체 일부로 집 안에 묘를 만든 서 의사의 묘 . 이후 17대 388년에 걸쳐 셔씨 집안은 원숭환의 묘를 지켜왔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명말 충신 원숭환 장군의 묘. 뒤에 보이는 작은 묘는 원숭환의 신체 일부로 집 안에 묘를 만든 서 의사의 묘 . 이후 17대 388년에 걸쳐 셔씨 집안은 원숭환의 묘를 지켜왔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청명을 앞둔 지난달 31일 추모객들이 단체 원숭환 장군 묘에 단체 참배하는 모습.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청명을 앞둔 지난달 31일 추모객들이 단체 원숭환 장군 묘에 단체 참배하는 모습.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최근 원 장군의 묘를 둘러싼 사연이 알려지면서 중국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원숭환 장군과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서(佘)씨 가문이 원 장군의 무덤을 지키는 일을 388년동안 17대(代)에 걸쳐 가업으로 이어온 사실 때문이다. 원 장군 추모제가 끝난 뒤 올해 80세인 17대 수묘인(守墓人ㆍ묘지기란 뜻) 서유즈(佘幼芝) 할머니를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원장군은 처형 당시 만고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 형을 당했는데 어떻게 베이징 한복판에 묘가 있나.
“처형당한 원 장군의 목이 저잣거리에 걸렸다. 그런데 밤 사이 목이 없어졌다. 원 장군을 모시던 부관 중의 한 사람이 몰래 훔쳐 묻었다. 역적의 묘를 만들어 모신 사실이 발각되면 극형을 면치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 분은 죽는 날까지 변성명을 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바로 우리 집안의 조상인 서 의사(義士)다. ”

17대 수묘인 서유즈 할머니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17대 수묘인 서유즈 할머니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그 뒤로부터 원 장군의 묘를 17대째 지켜왔다는 데 사실인가.
“서 의사는 대대로 원장군의 묘를 지키고 돌보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손들은 학문에 정진하되 벼슬은 하지 말라는 유언도 함께 남겼다. 원 장군처럼 올곧은 관리는 불행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벼슬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충절과 예의 도리는 알아야겠기에 학문을 게을리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우리 가문은 388년간 같은 장소에 살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원장군 묘와 사당을 관리하고 모셨다. 그 사이 중국의 천하는 명(明)에서 청(淸)으로, 이어 중화민국을 거쳐 지금의 신중국까지 바뀌었다. 4조(朝) 5세기(17∼21세기)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가업이다. ”

서유즈가 손자와 함께 원숭환 장군 묘소에 쌓인 눈을 치우는 모습.[사진 서유즈 할머니 제공]

서유즈가 손자와 함께 원숭환 장군 묘소에 쌓인 눈을 치우는 모습.[사진 서유즈 할머니 제공]

-직계 조상도 아닌 분의 묘를 모시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누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충의를 본받는 일은 후손의 도리 아닌가. 많은 분들이 나를 칭찬해 주셨고,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도 받았다. 하지만 찬양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 집안이 아니라 원 장군이다. 우리 가문은 그 분의 높은 정신에 감염된 것 뿐이다. ”
-생활에 도움이 안되는 일을 하다보면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문화대혁명 때 사당과 묘가 완전히 파괴됐다. 문혁이 끝난 뒤 24년 동안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며 사당과 묘, 비석을 복원해 달라고 청원했다. 아직도 온전한 옛모습이 아니다. 2수년 전부터 국가가 관리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우리 집을 내놓고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는데 그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지금도 건강하면 매일 찾아갈 텐데 거동이 불편해 그러지 못한다. ”

서유즈 할머니가 원숭환 장군의 묘에 과일을 올려놓고 주변을 비질하는 모습.

서유즈 할머니가 원숭환 장군의 묘에 과일을 올려놓고 주변을 비질하는 모습.

서 할머니가 보다 일찍 광취먼의 집을 내놓고 정부 보상을 받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으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수 도 있었다.하지만 그는 끝까지 원 장군의 묘소를 지키는 바람에 그럴 기회를 몇차례 놓쳤다.
서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던 아들은 광둥(廣東)성 둥관(東莞)에 있는 원숭환 기념관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숨졌다. 그는 둥관의 원숭환 의관총(衣冠冢ㆍ 옷을 묻은 무덤) 옆에 묻혀 영원히 원 장군의 곁을 지키고 있다.
인터뷰 내내 옆을 지키던 딸은 서 할머니를 ‘살아있는 문화유산(活文物)’이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서씨 집안의 388년 수묘를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기자는 “할머니는 충의를 몸으로 가르치는 살아 있는 교과서(活課本)”라는 말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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