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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와 윤이상은 어떻게 집에 돌아왔나

중앙일보

입력

바로크 시대 악기와 한국의 악기, 소프라노ㆍ바리톤과 한국 여창 가객이 함께 한 음악극 '귀향'. 2018통영국제음악제의 개막일인 지난달 30일 초연됐다.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바로크 시대 악기와 한국의 악기, 소프라노ㆍ바리톤과 한국 여창 가객이 함께 한 음악극 '귀향'. 2018통영국제음악제의 개막일인 지난달 30일 초연됐다.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지난달 30일 오후 10시 통영국제음악당의 블랙박스 극장. 관객 200여명이 두 줄로 입장해 긴 직사각형 무대의 양쪽에 마주보고 앉았다. 패션쇼의 관객 대형이었다. 한쪽에는 대금ㆍ거문고ㆍ해금ㆍ장구, 그리고 여창 가객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소프라노와 바이올린ㆍ쳄발로ㆍ비올라 주자 등이 배치됐다. 공연의 제목은 ‘귀향’. 17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몬테베르디 오페라 ‘율리시스의 귀환’과 한국 전통 가곡을 교차시킨 음악극이다.

2018통영국제음악제 화제의 오페라 '귀향'

공연 방식은 낯설었다. 율리시스의 아내 페넬로페가 부르는 노래 ‘돌아와요, 율리시스’가 끝나자마자 국악기의 연주가 시작됐다. 가객 박민희는 황진이의 시에 붙인 가곡 ‘동짓달’을 불렀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한 허리를 둘러내어/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가곡이지만 둘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공연은 두 문화를 조합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방식을 선택했다.

율리시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 이타카를 떠난다. 아내 페넬로페는 많은 구혼자를 물리치며 20년을 견딘다. 율리시스는 가까운 고향에 돌아오는 데 긴 세월을 쓴다. 마침내 귀환한 율리시스를 아내는 알아보지 못하고 율리시스는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몬테베르디 ‘율리시스의 귀환’의 내용이다. 독일 연출가 루트거 엥겔스와 음악감독 틸만 카니츠는 여기에 17세기의 한국 가곡 세 곡을 넣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 사랑에 대한 의심,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가곡을 골랐다.

음악극 ‘귀향’은 여러 방식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여창 가객이 이탈리아 말로 아리아를 부르거나, 동서양의 악기 연주자들이 클럽 같은 분위기에서 다같이 연주하며 춤을 추고, 국악기에 맞춰 서양 창법의 성악가들이 대사를 읊었다. 무대 바닥에는 자갈이 잔뜩 깔려있었고 출연자들이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소리가 났다.

음악극 '귀향'에서 노래한 바리톤 이응광(왼쪽)과 소프라노 안나 라지에예프스카.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음악극 '귀향'에서 노래한 바리톤 이응광(왼쪽)과 소프라노 안나 라지에예프스카.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음악극 ‘귀향’은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초연됐고, 올해 음악제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였다. 루트거 앵겔스는 2013년에도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신선한 작품을 올렸다. 헨델 오페라 ‘세멜레’에 영국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쇼를 접목시켜 만든 오페라였다. 이번 작품 ‘귀향’은 엥겔스가 통영을 위해 만든 음악이었다.

초연 후 만난 엥겔스는 “작곡가 윤이상의 유해 반환에 맞춰 제작한 작품인가”라는 질문에 “윤이상과 율리시스는 서로 독립된 스토리인 것이 분명하다”라고 했다. 율리시스는 고향을 떠나 20년을 떠돌다 돌아왔고 윤이상은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난 23년 만인 올해 고향 통영으로 묘소를 옮겨왔다. 엥겔스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을 묻고 싶었다. 오래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다”라고 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윤이상에 대입시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율리시스의 고향과 마찬가지로 윤이상의 한국 또한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라고 했다.

연출가 루트거 엥겔스.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연출가 루트거 엥겔스.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그가 시도한 이탈리아와 한국의 17세기 음악의 만남은 새로웠지만 자연스럽기 보다 인위적인 쪽에 가까웠다. 엥겔스는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귀향’의 주제 전달 방식은 청중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 방향의 해석이 가능했다. 오페라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선 인간의 미약함, 사랑이라는 가치의 변화무쌍함, 사람에게 고향의 의미 등을 청중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주제는 전쟁과 인간의 관계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이번 작품에 율리시스 역으로 참여한 바리톤 이응광은 “인간에게 남은 전쟁의 트라우마를 표현하기 위해 원작 스토리를 각색해 극적인 전환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2018 통영국제음악제는 지난달 30일 오후 2시 윤이상의 추모행사로 시작했다. 윤이상의 유해는 지난달 20일 통영국제음악당의 바로 옆 산자락에 묻혔다. 미망인 이수자(91) 여사는 추모행사에서 “남편은 늘 ‘나이가 들면 고향에 돌아가서 통영의 공기와 경관에 젖어 살고 싶다’고 말했다”며 “이장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같은 시간 추모지 바로 옆에서는 윤이상의 친북 행적을 비판하는 집회가 열렸다. 통영국제음악재단의 플로리안 리임 대표는 “대화와 열린 마음으로 서로 노력해야 윤이상의 진정한 복권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추모 연설을 했다. 같은 날 오후 7시 30분 공연 무대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윤이상 선생의 유해가 마침내 고향에 오게 돼 감격스럽다”며 “베를린에서 만났을 때도 고향을 그리며 김장 김치를 담그셨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작곡가 윤이상의 추모행사.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지난달 30일 열린 작곡가 윤이상의 추모행사. [사진 통영국제음악재단]

이처럼 올해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의 귀향을 둘러싼 여러 방식의 의미 부여로 시작했다. 음악제는 8일까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열린다. 최근 악보가 발견된 윤이상의 초기작 ‘낙동강의 시’(1956) 세계 초연(5일 공연)을 비롯해 윤이상의 작품 연주가 많다. 8일 폐막공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센바흐와 함께 번스타인의 세레나데를 연주하고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들려주며 고향과 귀향에 대한 메시지를 다시 한번 던진다.

통영=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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