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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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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검찰의 수사 브리핑을 들을 땐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모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검찰의 입장에선 수사 보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피의사실 공포(公布)라는 위법행위도 피해 가야 한다. 그래서 속시원하게 말해 주기 어렵다. 동문서답식의 선(禪)문답 속에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스무고개 놀이' 같은 문답은 창과 방패의 논리와 비슷하다. 브리핑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그만큼 각양각색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를 지휘했던 안강민 대검 중수부장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이정수 수사기획관도 '지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모르쇠로 일관했다. 기자들은 "…(아무 말 없음)" "고개만 끄덕끄덕" "눈만 멀뚱 멀뚱…"이란 표현으로 당시 상황을 전해야 했다.

김현철씨 비리사건 수사의 주역이었던 심재륜 중수부장은 '심통'이란 애칭답게 선문답으로 대신했다. 기자들의 질문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면서도 알 듯 모를 듯한 취재 단서를 흘려 줬다. "공짜로 정보를 얻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DJ비자금 사건을 처리했던 박순용 중수부장은 "신중히 검토해 결정하겠다"는 말로 일관해 기자들로부터 '박 신중' '박 검토'란 별칭을 얻게 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브리핑이라는 표현보다는 '티 타임'이란 말로 불렸다. 검찰이 앞장서 수사 상황을 언론에 알려 주고 있다는 시중의 비난을 의식해서다.

김대중 정부 이후 브리핑 제도가 정례화됐다고 볼 수 있다. 언론보도가 너무 앞서가 수사에 지장을 주는 것을 막아 보겠다는 취지에서다. 당시 이명재 중수부장 등은 노란 종이에 연필로 쓴 메모를 손바닥 안에 넣고 핵심을 전달하는 브리핑을 했다. 하지만 일부 간부는 거짓말도 곧잘 해 신뢰를 잃기도 했다. 이는 수사의 형틀마저 흐트러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최근 현대차 비자금사건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 브리핑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던 토리 클라크는 '돼지 입술에 립스틱(Lip-stick on a Pig)'이란 책에서 바람직한 브리핑 방향 등을 제시했다. "돼지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들, 돼지는 돼지일 뿐"이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브리핑에선 진실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것이다. 언론에는 "달을 보라고 손짓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본다"는 성철스님의 일갈이 정신을 퍼뜩 들게 한다. "졸면 죽는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박재현 사회부문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