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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이수일과 심순애'의 일본 원작 '곤지키야샤'를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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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타미 시의 해변에는 ‘곤지키야샤’의 명장면을 담은 ‘간이치.오미야 동상’이 서있다(左). 오른쪽은 곤지키야샤를 번안한 ‘장한몽’의 표지.


'이수일과 심순애'의 일본 원작인 '곤지키야샤(金色夜叉)'의 한 장면이다. 아타미 시의 게이샤들은 샤미센을 연주하며 무용을 섞은 몸짓으로 명장면을 되살렸다. 1897년부터 요미우리신문에 소설로 연재,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전.중.후편에 이어 속편, 속속편까지 연재되다 작가(오자키 고요)가 1903년 위암으로 숨지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덕분에 작품의 배경인 아타미 시는 일본 열도에 온천 명소로 이름을 알렸다.

이날 곤지키야샤에 이어 무대에 오른 것은 한국 작품 '장한몽(長恨夢)'이었다. 곤지키야샤를 번안한 장한몽(조중환 작, 1913년 매일신보 연재)은 '이수일과 심순애'란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연재 당시 독자들은 소설을 보려고 신문 배급소 앞에 새벽부터 줄을 섰다고 한다. 객석을 꽉 채운 일본 관객들은 변사를 맡은 김기영씨의 일거수 일투족에 웃고 울었다. 같은 뼈대에 다른 살점들. 두 작품의 맛은 그렇게 같았고, 또 달랐다.

공연을 지켜 본 정광(전 고려대 국문학)교수는 "진지하기 짝이 없던 곤지키야샤를 장한몽에선 다소 희화화한 측면이 있다"며 "당시 사람들의 근대화에 대한 강한 반발 심리가 작품에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촌스럽기 짝이 없는 신파 연극(혹은 신연극)이 당시에는 가장 세련된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다른 점은 또 있다. 간이치가 오미야를 찰 땐 게타를 신었고, 로맨스의 배경도 아타미의 해변이었다. 반면 이수일은 구두를 신은 채 심순애를 찼고, 공간적 배경도 평양의 대동강변이었다. 15년이란 두 작품의 시차 도 다소 영향을 미쳤다. 결말도 대조적이다. 4년간 김중배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순결을 지켰던 심순애와 이수일은 해피 엔딩을 맞는다. 권선징악.해피 엔딩.정조 관념 등 고전소설의 틀을 깨지 못한 대목이다. 반면 남편에 의해 강제로 몸을 버린 오미야와 간이치의 관계는 비극으로 치닫다가 중단됐다.

일본 호세대학의 가와무라 미나토 교수는 "곤지키야샤 역시 19세기 말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문 소설 '여자여, 약한 것'을 각색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며 "작품의 기본 뼈대와 다이아몬드를 주는 설정, 남자 주인공의 대사 등이 너무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아타미 시의 해변에는 '간이치.오미야의 동상'이 서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속삭일 때 해변에 있었다던 '오미야의 소나무'도 밑둥만 남은 채 전시되고 있다. 지금은 동상과 소나무 밑둥 사이에 '2대 오미야의 소나무'가 서 있다.

아타미=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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