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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기강 세운다더니 … 청와대 발언 후 흐지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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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 발단=이해찬 국무총리의 3.1절 골프가 시발이었다. 여론의 비난 속에서 이 총리가 경질된 뒤 20일 열린 청렴위 전원회의에서 "공무원은 직무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과는 자기 돈을 내고도 골프를 치면 안 된다"는 방침이 결정됐다.

당시 회의 참석자는 "골프 금지령은 충분히 준비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골프는 안 되고 등산은 허용되느냐는 등 몇 가지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그대로 통과됐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청렴위는 23일 공식적으로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 전개=주말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발표된 골프 금지령 때문에 공직사회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경제부처에선 직원들에게 일제히 e-메일을 보내 "골프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는가 하면, 뒤늦게 골프 약속을 취소하느라 부처마다 공무원들이 허둥댔다. 청와대도 공무원 사회의 동요를 감지했다. 청렴위 관계자들은 23일 오후 청와대로 불려들어가 해명을 했다. 하지만 이미 발표까지 했기 때문에 그대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공무원 사회에선 "권위주의 정권 때나 가능한 지시가 아니냐" "시간이 좀 지나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시큰둥한 반응이 많았다. 골프를 치려던 공무원들은 등산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골프장 대신 골프 연습장을 찾기도 했다.

◆ 반전=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의 김남수 비서관이 골프 금지령이 내려진 26일 현대그룹의 임원 등과 골프를 친 사실이 보도됐다.

김 비서관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10년 이상 친분을 맺어온 친구 2명과 이들을 통해 소개받아 6년 전부터 친하게 지낸 기업인 등과 함께 운동을 했다"면서 "골프 비용은 친구들이 대신 내줘 나중에 각자에게 5만원씩 돌려줬다"고 말했다.

청와대 이강철 대통령 정무특보는 취임 첫날인 27일 대구에서 청렴위의 골프 금지령을 비판했다. 그는 "(청렴위의 지침은) 정무적 판단도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한건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부정청탁이 있으면 사후에 사법적으로 처리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도 "청렴위가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다들 혼란스러워한다"면서 "청렴위가 후속조치를 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결말=청렴위는 28일 공무원 골프의 구체적 지침을 발표했다. 청렴위 김 처장은 "공무원은 직무 관련자와 골프를 칠 수 없다고 했지만 여기서 직무 관련자는 공무원에게 현실적.직접적.개인적 이해관계가 있는 민간인에 국한한다"고 말했다. 공직사회는 대부분 이를 골프를 쳐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 처장은 또 "청와대 눈치 보기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정치적인 문제에 답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경제부처 공무원 A씨는 "치면 안 된다고 했다가 불과 며칠 만에 이젠 괜찮다고 하는 등 청와대의 한마디에 왔다갔다 한다"면서 "이래서야 공직사회의 영(令)이 서겠느냐"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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