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노벨 평화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내 발명품이 평화 조약보다 더 빠른 평화를 불러올 것이오.” 여성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가 평화회의 참석을 요구하자 알프레트 노벨이 대꾸한 말이다. 노벨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전쟁을 억제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지만, 한때 비서이자 평생 친구였던 주트너의 설득으로 평화상 제정을 유언장에 남겼다.

이런 탄생 내력 때문일까, 노벨상 6개 부문 중 평화상만큼 뒷말이 많은 것이 없다. 정치·시대적 상황이 얽혀 이런저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1974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일본 총리(1964~72년 재임)의 수상은 노벨 평화상 최대의 오류로 꼽힌다. 그는 재임 중 “핵을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표명해 상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닉슨 미 대통령과 “유사시 핵무기의 오키나와 미군 기지 반입을 허용한다”는 비밀협약을 체결했다. 핵무기 보유는 않겠지만, 제조 능력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외무성 보고서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총리의 외종조부답게 본색은 핵무장론자였으나 이를 숨겼던 것이다.

1994년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 및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공동 수상했을 때는 한 심사위원이 “테러리스트에게 상을 줬다”며 사퇴했다. 73년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베트남 평화협정을 이끈 공로로 상을 받았으나, 공동 수상자였던 레둑토 베트남 정치국원은 “조국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레둑토의 말대로 베트남은 곧바로 다시 포연에 휩싸였다. 대통령 취임 첫해, 핵 감축 노력을 이유로 수상한 버락 오바마는 “업적이 아니라 말로 상을 받았다”는 비아냥을 샀다.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평화상 대가로 북한의 핵 개발 시간만 벌어줬다는 공세에 시달렸다.

남북과 북·미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벌써 노벨 평화상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김정은의 공동 수상이 거론되기도 한다. 수십 년간 한반도를 뒤덮었던 핵 위기가 일거에 해결된다면 노벨상 아니라 뭔들 아까우랴.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높고, 가야 할 길은 멀다. 행여나 미국과 북한 사이에 끼여 갈지자를 걷지 않을까도 걱정이다. 실패하면 지금보다 더 가파른 벼랑 끝이다. 강력한 무기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노벨의 신념이 다시 소환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공하면 뒷말 없는 ‘클린 노벨 평화상’은 덤으로 딸려올 것 같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