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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출두 안희정 9시간 조사 … 김지은 23시간 피해 진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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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06면

[이슈추적] ‘미래 권력’의 성범죄 몰락 전말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성추문이 제기된 지 93시간 만인 9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서부지검으로 자진 출두하고 있다.[뉴스1]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성추문이 제기된 지 93시간 만인 9일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서부지검으로 자진 출두하고 있다.[뉴스1]

높게 비상(飛翔)한 것 이상으로 낮게 추락했다. 대선주자였던 이가 검찰청사 앞에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개××” “감방 가라”는 욕설이 쏟아졌다.

정의·인권·민주 얘기하던 여권 거물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간음 혐의 #JTBC 보도 93시간 만에 자진 출두 #조사 뒤 “열심히 했던 참모, 미안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다. JTBC의 보도로부터 그의 검찰 출두까지 93시간이었다. 그사이 그는 정의와 인권, 민주주의를 얘기하던 ‘미래 권력’이었다가, 성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미래를 망친 피의자이자 심리 연구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와 함께하던 이들도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겨야 할 처지가 됐다. 그 시작과 끝을 따라가 봤다.

# 폭로와 사퇴

“오늘 저희는 촉망받는 유력 정치인의 성폭력 의혹을 피해 당사자의 고백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정치인은 바로 안희정 충남도지사입니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그의 수행비서였고, 지금도 정무비서인 김지은씨입니다.”

 5일 오후 8시 JTBC 뉴스룸의 오프닝이었다. 안 전 지사에겐 운명의 전복(顚覆)이었다. 김지은씨는 직접 스튜디오에 출연, “안 지사에게 8개월 동안 네 번에 걸쳐 성폭행을 당했고, 그 외에도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폭로를 결심한 계기로 ‘미투(#MeToo) 운동’이 퍼지던 지난달 말에 있었던 성폭행을 꼽으며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안 지사에게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김씨는 안 전 지사가 성폭행 전후로 ‘잊어라’ ‘아름다운 풍경만 기억해라’ ‘괘념치 말라’를 문자 메시지를 보낸 사실도 공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오후 10시 긴급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안 전 지사에 대한 출당과 제명 조치를 의결했다. 이례적 속도의 징계였다. 외부와 연락을 끊었던 안 전 지사는 다음 날인 6일 0시49분 페이스북을 통해 공식 사과를 했다. “모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 무엇보다 저로 인해 고통받았을 김지은씨에게 정말 죄송하다.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곤 도지사직을 사퇴하고 정치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 97시간의 잠적

안 전 지사가 모습을 감춘 건 이보다 먼저였다. 5일 오후 4시 일정이 마지막이었다. 김씨의 JTBC행을 확인한 직후였다고 한다. 신형철 전 지사 비서실장은 언론과의 전화 통화에서 “기자의 (취재) 확인 전화를 받고 김지은씨에게 연락을 취했었다”고 말했다. 안 전 지사는 김씨의 폭로를 예상하지 못한 듯, 당일 오후 충남도 직원들에게 “최근 확산되고 있는 미투 운동은 남성 중심적 성차별 문화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말했었다.

 안 전 지사의 이후 종적은 묘연했다. 신 전 비서실장과 일부 변호인단과 함께 있다는 얘기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러다 7일 신 전 비서실장이 기자들에게 “안 전 지사가 8일 오후 3시 충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8년간 집무했던 공간에서 사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안 전 지사 측에선 “추가 피해자는 없다”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7일 밤 제2의 폭로가 있었다. 안 전 지사의 싱크탱크인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의 직원 A씨였다. “2015년 10월 연구소 인근 행사 뒤풀이 장소에서 안 전 지사가 신체 일부를 만지는 등 처음 성추행을 했고, 지난해 1월 서울의 한 호텔로 불러 성폭행하는 등 일곱 차례에 걸쳐 성폭행과 성추행을 했다”는 주장이었다. 김지은씨에게 한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도 했다. 안 전 지사는 이에 대해선 함구했다.

 8일 안 전 지사는 약속 시각을 2시간여 앞두고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신형철 전 비서실장을 통해 보낸 문자 메시지에선 “이른 시일 안에 검찰에 출석해 수사에 성실하게 협조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검찰은 한시라도 빨리 저를 소환해 달라. 성실하게 임하겠다”고 했다.

# 수사와 설, 패닉

김지은씨가 6일 서울 서부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과 ‘위계 등 간음’ 혐의다. 곧 수사가 시작됐다.

 그러는 사이 각종 ‘말’들이 휘몰아쳤다. 안 전 지사의 지지 그룹이 운영했던 트위터 계정 ‘팀스틸버드’는 안희정 대선캠프 출신이 제기한 추가 의혹을 공개했다. “(경선 캠프 내에서) 노래방에 가서 누군가 끌어안거나,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거나, 노래와 춤을 강요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선배에게 머리를 맞거나 뺨을 맞고도 술에 취해 그랬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하면 묵살당하는 분위기에서 선배들과의 민주적인 소통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안 전 지사가 정치적 음모에 의해 희생됐다는 주장도 저류에 흘렀다.

 그간 자유한국당에 비해 성 추문이 덜 제기됐던 민주당은 배신감과 공포감에 떨었다. 안 전 지사와 가까운 한 의원은 “안 전 지사와 폭로 이후 따로 연락도 안 하고 지낸다. 나 스스로 패닉이고 ‘멘붕’이고 분노스럽다”며 “도청에 다시 들어가 사과 회견을 하면 사람들이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그런 생각밖에 더 했겠나”라고 했다.

 안 전 지사와 함께했던 이들은 동반 추락했다. 그의 친구이자 충남도지사 후보로 뛰고 있는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도 성 추문 의혹에 휩싸였다. 허승욱 전 충남 정무부지사는 천안갑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강훈식·김종민·박완주·양승조·어기구 등 민주당 충남 지역 의원들은 대국민 사과문을 냈다. 김종민 의원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알지도 막지도 못했으니 스스로 한탄스럽고 모든 분에게 죄스러울 뿐”이라고 했다.

# 출두

9일 오후 5시 안 전 지사가 서울 서부지검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진 출두 형식이었다. 당일 김지은씨도 서부지검에서 고소인 조사를 받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있는 상황이 됐다. 피해 여성들을 대리하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안희정의 일방적 출두 통보에 매우 강력히 유감을 표한다”고 반발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수사가 다 이뤄진 게 아니라서 검찰이 안 전 지사를 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출두한 건 일종의 ‘정치’”란 주장도 나왔다.

 안 전 지사는 국민과 도민, 가족에게 다섯 차례 “죄송하다”고 했다. 그로부터 9시간30분 뒤인 10일 오전 2시30분 검찰청을 나설 때에야 비로소 김지은씨를 향해 사과했다. “나를 지지하고 나를 위해 열심히 했던 내 참모였다. 미안하다. 그 마음의 상실감과 배신감, 다 미안하다”고 했다. 혐의를 인정하는지에 대해선 그러나 “앞으로 검찰 수사와 진행 과정에서 계속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만 했다. 법적으로 다투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김지은씨는 23시간30분 동안 조사를 받고 이날 오전 9시30분 검찰청을 나섰다.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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