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지폐로 만든 핸드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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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큰 숫자를 나타내는 단위는 만, 억, 조, 경 순으로 올라간다. 우리나라 경제 통계에서 쓰이는 최대 단위는 기껏 경(京)이다. 국부(국민순자산, 2006년 말 1경3078조원) 총액 등을 집계할 때나 사용된다. 경 다음엔 뭘까.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 등이다. 인류 역사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꼽히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헝가리 경제를 설명하려면 이런 단위를 써야 한다. 독일 편에 섰다가 패전한 뒤 헝가리의 물가는 15시간당 두 배꼴로 뛰었다. ‘펭괴’ 화폐는 글자 그대로 휴지보다 못한 존재가 됐다. 1944년 6월 미화 1달러당 33.5펭괴이던 환율은 2년 뒤 46양(穰)까지 올라갔다. 46 다음에 0이 28개나 붙는다. 헝가리는 결국 40양 펭괴당 1포린트의 교환 비율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화 지폐가 종이공예 재료로 전락했다는 외신이 나왔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젊은 부부가 100볼리바르 지폐 1000장 정도를 접어 만든 핸드백을 10~15달러를 받고 판다는 것이다. 10만 볼리바르가 들지만 미화로 50센트도 안 된다. 하루 20개가 팔린다니, 창고 노동을 하며 한 달 2.5달러를 벌던 이 부부로서는 성공적인 전업이다. 퍼주기 복지 후유증에 미국의 경제제재까지 겹쳐 지난해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율은 4300%에 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바이마르 정권하의 독일 국민이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벽지 대신 지폐를 바르는 사진이 생각난다.

인플레이션은 화폐에 대한 신뢰를 깬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당장 닥친 경제위기나 과다한 채무를 해소하기 위해 돈을 찍는다. “돈과 통치자가 존재하는 한 인플레이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인플레이션』, 벡·바허·헤르만)이란 말이 이래서 나온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미국이 ‘헬리콥터로 뿌리듯’ 돈을 찍어낸 것이 대표적 예다. 암호화폐가 주목을 받는 것도 기존 화폐에 대한 불신이 한몫했다.

우리는 당장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어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동결한 것도 물가 안정이 받쳐줬기 때문이다. 치솟는 아파트값과 장바구니 물가를 생각하면 선뜻 수긍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통계는 그렇다. 하지만 바다 건너 미국은 분위기가 다르다. 그동안 엄청나게 풀렸던 돈의 효과로 경기가 좋아지자 슬슬 인플레이션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금리 인상도 속도를 낼 태세다. 아직 괜찮다 안심하지 말고 미리미리 만반의 대비를 해야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