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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를 네가 알렷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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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호 34면

문이 열리니 저승이었다. 불구덩이 너머 거대한 심판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엎드려 좌우를 살피니 먼저 잡혀온 자들이 보였다. 머리를 빡빡 깎인 채 회색 죄수복을 입고 웅얼웅얼 제 죄를 고하고 있었다.

서현의 상상력사전: 염라대왕

심판자의 침묵, 그것이 가장 두려운 취조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답을 알 길이 없었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기 때문이다. 내게 익숙한 물음은 이렇다. 다음 중 당신이 지은 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 중 당신의 죄로 가장 큰 것을 고르시오. ‘다음’ 밖에는 답이 없고 ‘다음’ 안에는 답이 하나였다.

어이없는 문제들이었다. 다음 중 전당포 노파를 죽인 라스콜리니코프가 느꼈을 감정을 고르시오. 러시아에서는 3번 ‘정의감’이라고 써도 되는 모양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한국에 왔다면 대학 입학은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의 정답은 2번 ‘죄책감’이니까. 출제자 수준을 넘는 상상력, 논리적 추론, 감수성 발휘 금지.

그래서 교육청, 교육평가원 홈페이지에 가서 무슨 이 따위 문제를 내느냐고 비난글로 도배했던 게 나다. 그때 내 아이디가 염라대왕이었다. 간혹 저승사자도 섞어 썼다. 혹시 내가 그 죄목으로 잡혀온 건 아닐까. 염라대왕 사칭죄, 혹은 저승사자 모독죄. 피씨방 가서 올렸는데 어떻게 추적했을까.

출제자의 의도를 간파해야 한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이건 평서문인가 의문문인가. 네 죄를 네가 알고 있다고 나는 알고 있다. 혹은 네 죄를 네가 안다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는 아느냐. 평서문이면 대답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괘씸죄가 추가될 것이다.

의문문이면 답은 단답형인가 서술형인가. 단답형이면 예, 혹은 아니오. 그러면 염라대왕은 추궁을 이어갈 것인데 알아서 딱딱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또 괘씸죄. 서술형으로 판단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면 묻지도 않는 말에 나섰다고 역시 괘씸죄. 어찌 되었건 나는 가중처벌되는 구도다. 질 수 밖에 없는 게임.

털어놓자. 일단 내 죄를 정리, 분류해야 한다. 기준이 필요하다. 그 죄들은 무거운가 가벼운가, 큰가 작은가. 그렇다면 죄의 계량단위는 무엇인가. 미터, 그램, 평, 파운드. 해당되는 것이 없다. 계량단위가 없다면 어떤 죄의 크기를 1로 삼고 상대적으로 재야 한다. 과학시간에 들은 비중과 흡사하다. 기준 죄를 찾아야 한다. 그 죄의 선택 근거는 무엇인가. 그 선택은 합리적인가 자의적인가.

뭔가 머리를 스쳤다.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피해자다. 이 세상은 내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왜곡된 교육의 피해자고 야만적 사회의 희생양이다. 내가 성금함을 지나친 건 여유를 박탈한 경쟁 사회의 억압이었고 담배꽁초를 하수구에 던진 건 휴지통을 철거한 도시의 책임이었다. 나의 분노조절장애는 선천적이고 책임은 그 단추를 꾹꾹 누른 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내 안에 잠재하는 다른 나와 내통하여 나를 조종했다. 그들이 내 죄의 주범이다.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건 자충수다. 내게 죄가 없다고 할수록 그들의 죄가 무거워진다. 그런데 그들도 결국 염라대왕에게 불려와 나와 똑같이 변명할 것이다. 나는 다시 소환될 것이니 내가 바로 그들이다. 이제야 내 죄를 내가 알겠다.

폭력과 사기의 전과가 없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춥고 아프고 외로운 이들을 두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물며 구실을 댔다. 서럽고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고 시끄럽다고 불평했다. 다수의 편안을 이유로 소수의 차별을 외면했다. 나와 다를 뿐인데 틀린 것이라며 추궁했으니 내가 뱉은 말이 그들의 마음을 후볐을 것이다. 배려하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였다. 모두 제 죄입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드니 촛불이 환했다. 잠결에 들어섰던 법당에는 아직 새벽 예불이 한참이고 극락정토의 부처님이 미소 속에 앉아 계셨다.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

서현 :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본업인 건축 외에 글도 가끔 쓴다. 건축에 관한 글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뒤집는 건축적 글쓰기방식에 더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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