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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없는 결혼’이더라도 독일의 협치가 부럽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70호 02면

사설

우여곡절 끝에 독일 대연정 협상이 타결됐다. 지난해 9월 24일 총선이 치러진 지 4개월여 만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중도 우파 기민당과 바이에른주 자매정당 기사당, 그리고 중도 좌파 사민당은 지난 7일 177쪽에 달하는 대연정 합의안에 서명했다.

메르켈 총리하에서만 세 번째인 이번 대연정 협상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이었다. 총선 전 마르틴 슐츠 전 사민당 대표의 확고한 대연정 참여 거부 선언이 최대 난관이었다. 지난해 9월 총선에서 기민·기사연합은 제1당을 차지하긴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악의 선거 결과를 거뒀다. 연정이 다급해진 메르켈 총리는 친기업 성향의 자민당과 친환경 녹색당을 상대로 이른바 자메이카연정 구성에 나섰지만 자민당이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당인 사민당마저 연정 협상을 거부했더라면 메르켈은 과반이 안 되는 소수정부를 꾸리거나 새 선거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독일은 물론 유럽연합(EU)으로서도 독일의 장기적 정치 공백은 엄청난 악재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지난 총선에서 제3당(하원 707석 중 92석)으로 급부상한 극우 독일대안당(AfD)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재선거를 하게 되면 반이민·반EU를 내건 AfD만 더욱 유리해지는 여론조사 앞에서 양대 국민정당이 각자의 당익만 추구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공은 사민당으로 넘어갔다. 다시는 메르켈과 대연정을 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했던 슐츠 전 대표와 지도부는 흔들렸다. 약속을 지키자니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를 방치하는 부담이 컸고, 협상에 들어가자니 명분이 약했다. 슐츠 전 대표와 사민당 지도부는 자기 당의 신뢰에 금이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심 끝에 독일과 EU의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대의를 내세워 협상을 받아들였다. 대연정 예비협상 결과를 대의원들로부터 추인받기 위해 지난달 21일 본에서 열린 사민당 특별전당대회가 고비였다. 안드레아 날레스(47)는 “도대체 무엇이 큰 것인가”라며 “우리 의제를 다 관철할 수 없어 대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면 사람들은 우리더러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본협상에서 사민당이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다고 독일 언론들은 분석했다. 사민당은 재무·외교장관을 포함해 핵심 각료 6자리를 배분받았다. 대연정 합의안엔 사민당이 제안한 정책이 대거 포함돼 있다. 혹자는 새 대연정 합의를 두고 ‘애정 없는 결혼’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양측의 주고받기(give & take)식 대타협의 결과에 안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2차 대전 후 독일 정치는 흔히 대화와 타협, 협치를 모아 놓은 ‘종합예술’로 격찬받아 왔다. 앞으로 사민당의 47만 전 당원 찬반투표를 통과해야 대연정이 시작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협치정신만큼은 부러운 종합예술이다. 어차피 어떤 정당이든 모든 것을 얻기는 힘들다는 게 독일 정계에선 상식이다. 독일 정치인들은 정치권의 극단적 분열이 극우 나치 시대를 열었다는 뼈아픈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정치는 지금 어떤가. 북한 핵·미사일 위협, 중국의 압박 등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앞에 눈앞의 표를 좇아 ‘분열 즐기기’에 몰두하고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적폐 청산 시리즈, 대안 없는 반대와 떼쓰기 등으로 국론은 양분되고 갈등은 고조되고 있다. 미국·일본·중국·북한 등 우리를 둘러싼 외교 환경은 과거 어느 때보다 고차원의 방정식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데도 그렇다. 정치권은 언제쯤 시대를 앞장서 통합을 외칠 수 있을까. 타협과 양보, 협상과 협치는 우리 정치 DNA에는 없는 것인가.

이번 독일 대연정 협약엔 ‘유럽의 새로운 출발, 독일의 새로운 역동성, 국가의 새로운 화합’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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