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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2차대전 일본군 포로가 된 호주 의사 “짐승처럼 살고 행동하고 이해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문학동네

연애세포를 일깨우는 로맨스 영화가 있듯이, ‘문학세포’를 일깨우는 소설이다. 이런 문장들을 읽을 수 있다. “죽어가는 바람이 킹오브콘월의 복도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흐릿한 불빛에 피로가 배어 있었다.” “오래된 토사물, 서로의 몸, 배설물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에 둘러싸인 채 계속 시간이 흘렀다. 때가 반질반질한 몸과 비탄에 잠긴 마음으로 1000마일(1600㎞). 닷새 동안 먹을 것은 전혀 없었고, 기차는 여섯 번 멈췄으며, 세 명이 죽었다.” “경비병일 때 그는 짐승처럼 살고, 짐승처럼 행동하고, 짐승처럼 이해하고, 짐승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그런 짐승 같은 모습이야말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인간적인 모습이었음을 이해했다.”

26쪽에서 “말(言)을 왜 그렇게 좋아해요?”라고 묻는 연인의 질문에 주인공 도리고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알게 된 최초의 아름다운 것이 말이었습니다.”(28쪽) 그 말의 아름다움을 웅변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포로로 끌려간 오스트레일리아인 의사 도리고 에반스의 일대기다. 일본의 미얀마 철도건설 현장에서 살아남아 화려한 전쟁영웅이 된 그의 삶과 죽음, 사랑과 전쟁을 그렸기에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를 썼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문학의 고전적 풍모를 갖춘 소설의 백미는 대하 드라마다운 서사라기보다는 수려한 문장들, 그리고 결국은 비극인 삶을 단 한 번도 비극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단정한 문장을 무심한 듯 툭툭 던져놓을 뿐인 작가의 태도다.

오랜만에 문학적 포만감을 던져주는 소설은 동시에 지극히 영화적이기도 하다. 소설은 주인공 도리고 외에 수많은 조연을 주연급으로 따라가며 시점과 인칭, 시제를 넘나든다. 과거에서 현재로, 또다시 더 과거로, 그리고 도리고에서 일본인 소령 나카무라, 연인 에이미, 조선인 포로 최상민 등으로 쉼 없이 주인공이 바뀌니 멀티 캐스팅(복수 주연)에 플래시백 편집 효과가 극대화된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주 출신인 작가 플래너건은 2014년 이 책으로 맨부커상과 오스트레일리아총리문학상 등을 받으며, ‘고향 태즈메이니아섬의 호메로스로 불리는 작가가 현대 영문학사의 지형도를 바꿨다’는 평을 얻었다. 책은 12년간 집필해 완성한 5개 판본 중 마침내 나온 최종판이다. 맨부커상 심사위원장 A.C.그레일링은 “올해 수상작은 그야말로 걸작이다. 이 작품은 세계문학의 카논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양성희 논설위원 sh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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