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찍고… 채이고… 유치해도 재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초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초고속 인터넷을 쓴다고 문명세계에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비록 눈 앞에 열대우림은 없지만 이 세상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이다. 일터에서만이 아니다. 사랑도 쟁취해야 한다. 물고 뜯는 맹수들의 싸움 만큼은 아니더라도 맘에 드는 짝을 차지하려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차마 용기가 없다면, 아니 이미 처참하게 적자생존에서 '도태'됐다면 TV나 볼 일이다. 잘나고 잘생긴 선남선녀들이 이성에게 선택받지 못해 수모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위안이라도 얻거나, 아니면 자신이 저 멋진 이성의 짝이 된 듯한 대리만족이라도 얻을 수 있으니까.

이 세상은 늘 살아남은 자보다 경쟁에서 탈락한 자가 더 많기 때문일까. 요즘 TV는 잠시나마 초라한 자신을 잊게 해주는 짝짓기 프로그램으로 가득하다.

토요일 저녁 지상파 방송은 이미 '강호동의 천생연분'(MBC)과 '자유선언 토요대작전-장미의 전쟁'(KBS)같은 연예인 커플 만들기 프로그램이 저질 시비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이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자체 제작이 아니라 수입 프로그램이 대부분인 케이블.위성 방송도 마찬가지다. 인기를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연예인이나 어린애같은 천진함을 내세운 할머니.할아버지('까치가 울면-만나면 좋은 친구'.MBC)가 아니라 허우대 멀쩡하고 직업도 그럴 듯한 젊은 남녀가 등장해 이성을 뺏고 뺏기는 노골적인 정글 게임을 벌인다.

현재 방송 중인 '러브 서바이벌'(동아TV.원제 파라다이스 호텔)과 '배첼러 Ⅲ'(리빙TV)'백만장자와 결혼하기'(OCN) 등은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다양한 방식의 짝짓기 프로그램들이다.

지난달 인기리에 앙코르 방송까지 마친 '서바이벌 천생연분'(캐치온'.The Bachelorette)과 클린턴 전 미 대통령과의 염문으로 유명해진 모니카 르윈스키가 사회를 보는 '미스터 퍼스낼러티'(캐치온.10월 방영 예정), 여기에 인기 TV시리즈 '섹스 앤 시티'(OCN)의 주인공들처럼 진짜 뉴욕 커리어 우먼들의 남성찾기를 훔쳐보는 '리얼 섹스 인 더 시티'(Q채널)까지. 이쯤되다보니 TV만 틀면 짝짓기 프로그램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짝짓기 프로그램 열풍이 불고 있다.

사실 짝짓기 프로그램의 인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사랑의 작대기를 주고 받던 1990년대의 '사랑의 스튜디오'(MBC)시절부터 늘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던 히트상품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전과는 좀 다르다. 점잔빼고 출연자 체면 차려주던 관례는 깨진 지 오래다. 말이 짝짓기 프로그램이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진짜 재미는 출연자가 얼마나 충격적으로 탈락하는지, 또는 얼마나 호화롭게 즐기고 노는지를 관람하는 데 있다. 일종의 현실도피인 셈이다.

공개적 망신주기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지 못하면 이성 눈 앞에서 '질질질'끌려나가거나 0표 클럽의 불명예를 주는 것(강호동의 천생연분)은 오락적 요소를 극대화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게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와 짝이 될 수도 있다는 헛된 환상이라도 심어줘야(장미의 전쟁)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청자들을 자극하지 못한다.

'까치가 울면'(MBC)의 김영진 PD는 "짝짓기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이 출연자가 된 듯한 감정이입과 이를 통한 대리만족이 성패의 중요한 요소인데, '만나면 좋은 친구'코너는 출연자가 보통의 노년층이다보니 이런 시청자의 환상을 충족시켜주기에 부족했다"며 이 코너를 이번주부터 접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했다.

국내 짝짓기 프로그램이 이처럼 출연진의 희화화나 시청자의 대리만족으로 인기를 끈다면 수입 프로그램은 탈락의 묘미와 호화로운 눈요기거리를 무기로 내세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동화 속 사랑을 대리체험하는 묘한 기분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방송 전부터 외신을 통해 엄청난 화제를 뿌렸던 '백만장자와 결혼하기'(Joe Millionaire)와 '배첼러'가 대표적인 예다. 부자면서 미남인 '킹카' 주인공이 수십명의 미녀 가운데 한 명을 고르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여성들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식이다.

주인공은 출연 여성들과 최고급 리조트에서 온천욕과 마사지, 댄스 파티 등 온갖 호화로운 데이트를 즐긴 후 15명, 8명, 4명,2명으로 파트너를 좁혀간다. 마지막엔 동화 속 성처럼 화려한 저택에서 왕자님이 무릎을 꿇고 '신데렐라'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유치하다, 저질이다 욕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짝짓기 프로그램. 현실이 동화처럼 달콤해질 때까지 그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을 듯하다.

안혜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