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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 우리를 춤추게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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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부 차장

김승현 정치부 차장

“잠시 2002년에 다녀왔다네, 친구.”

지난주에 만난 친구가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석 달 만에 만난 자리에서 근황을 묻자 돌아온 답변이었다. 함께 여행한 또 다른 친구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하노이 갔잖아.” 그제야 감이 잡혔다. 친구들의 베트남 여행 기간은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 기간이었다. 박항서 감독이 이끈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이 준우승한 그 대회다.

겨울 휴가를 떠난 친구 일행에겐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카페에서 조용히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어느새 주변이 사람들로 꽉 들어찬 거야.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어. 무슨 일인가 봤더니 카타르와 4강전을 하는 날이더라고. 카페에서 함께 축구를 보다가 ‘붉은악마’가 돼버렸지.”

친구들의 목소리는 톤이 한껏 올라갔다. “옆에 있는 베트남 사람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춤추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깨동무하고….” 승부차기 승리는 진짜 우리나라가 이긴 것처럼 기뻤다고 했다. 며칠 뒤 결승전 때는 식당 직원들과 ‘엮였다’. TV를 보느라 서빙도 잊은 채 손님을 방치한 그들과 함께 ‘박항서’를 외쳤단다. 우리의 ‘대~한민국’ 박수도 가르치고, 피자 두 판을 쐈다는 친구의 표정은 해맑았다. 아쉬운 패배로 끝났지만, 멋진 도전이 주는 흥분을 알기에 위로와 축하의 마음으로 다독여 줬다고 한다. 타임머신을 탄 듯 2002년에 다녀왔다는 친구들의 프롤로그가 충분히 이해됐다. 그때의 히딩크를, 붉은악마들을, 그 뜨거운 현장을 다시 경험했다는 게 부러웠다.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잠시 2002년에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 오픈 테니스대회 4강에 오른 정현 선수 덕분이었다. 세계 최강 페더러와의 승부를 기다리던 순간의 기대감은 흐른 세월을 고려했을 때 2002년의 그것에 버금갔다. 4강전 기권에 크게 실망했지만, 물집이 터진 정 선수의 발을 보고 뭉클했다. 귀국한 그가 JTBC 인터뷰에서 남긴 한마디는 아직도 귓전을 울린다. “내 발은 한계를 넘었다.” 열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지만, 열정을 다 바치면 도달할 수 있는 어느 경지를 경험한 사람의 언어였다. 2002년의 히딩크와 박지성, 2010년 밴쿠버의 김연아가 들려줬던….

앞으로도 새로운 열정의 성공 신화가 우리를 춤추게 할 것이다. 9일 개막하는 평창 겨울올림픽도 그 무대 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이번 올림픽의 슬로건 ‘하나 된 열정’(패션, 커넥티드)이 경기장 안팎에서 멋지게 구현되길 기원한다. 꼭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 최고의 대회를 만들기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이 ‘평양올림픽’ 같은 거친 수사(修辭)에 가려지지 않길 희망한다.

김승현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