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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 서울의 여름(5)전장군 중정부장 겸직이 정권관심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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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2·12」 세력이 본격적으로 정권에 관심을 갖고 행동을 개시한 것은 80년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발령 때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주도세력 내의 일치된 증언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대령들을 중심으로 군의 역할에 관한 논의와 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결론을 못 내리고 엉거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10·26사태 이후 이희성 육군참모차장이 잠시 부장서리를 겸임하다가 정승화 총장의 체포 후 참모총장이 됨으로써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윤익균 차장이 부장업무를 대리했으나 중정은 보안사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이미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이 중정 수술작업에 들어가 중정은 거의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사령관을 중정부장서리로 임명하자 당시 청와대당국자는 『중정부장을 임명치 않고 보류했던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범이 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도의적 측면에서 중앙정보부가 반성을 하고 책임을 져야했기 때문』이라고 인사배경을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최근 북괴의 대남 도발과 격동하는 국제정세 등 내외정세가 매우 어려운 국면에 들어감으로써 국가안보적 견지에서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킬 필요를 느끼게 됐다』며 현역군인인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서리를 겸임하는 것이 법률상 타당하냐는 시비에 대해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 부장이 타직을 겸임할 수 없도록 되어있지만 부장 「서리」로 임명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법률해석을 했다.

<치밀하게 계획·추진>
그렇지만 최규하 대통령이 꼭 이런 이유로 전사령관을 중정부장서리에 임명했는지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인사절차의 통례로 보아 이처럼 중요한 인사는 청와대 쪽에서 뭔가 낌새를 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임명 하루 전부터 겸임발령에 관한 소문이 국방부 주변에서부터 먼저 나돌았다. 이 같은 소문을 확인하려 하자 서기원 청와대대변인은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인사문제에 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답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대변인이 『오후 4시 반에 모종의 발표가 있다』고 예고한 것은 14일 오후 3시쯤이었다.
인사주무장관인 김용휴 총무처장관과 총무처의 김창식 차관·송영삼 인사국장도 청와대 발표 무렵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번 인사가 군내에서 치밀하게 계획· 추진되어 최대통령의 재가를 전격적으로 받아낸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게 하는 점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어떤 생각에서 전장군의 겸임발령을 허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대통령의 측근들은 최대통령이 12·12 이후 군의 인사나 통수권행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 측근은 심지어 최대통령은 국보위를 발족시키는 과정에서 전장군으로부터 자세한 상의를 받지 않았으며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결정할 군지휘관회의도 직접 주재한 적이 결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명경위야 어떻든 최규하 대통령이 영향력을 얼마나 행사했느냐와는 관계없이 전두환 장군의 중정부장서리임명은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큰 「사건」이었다.
특히 미국은 상당히 거부반응을 나타냈던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당시 신문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청와대로 최대통령을 방문, 전장군 인사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현역군인의 중정부장 겸임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군의 정치개입이 아니냐는 의견을 개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바로 이날 오후 AP통신은 워싱턴발로 미국이 한미 안보협의회를 연기 또는 취소키로 했다는 보도를 해 「글라이스틴」의 지적이 미국의 항의적 성격이었음을 뒷받침했다.
또 뉴욕타임스는 15일 『군 정보기관의 장이 한국의 정치적 정보기구를 장악하게 된 것은 처음이다. 49세의 전장군은 두 가지 직책을 겸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가장 강력한 인물로서 그의 지위를 강화하게 되었다』고 논평했다.
미국과 국내외의 언론이 군의 동정에 이처럼 촉각을 세우고 있었던데 반해 3김씨와 정당들은 전장군의 등장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일부러 과소평가하려 한 인상이 짙었다.
강원도 순방 중 설악산 관광호텔에서 전장군의 중정부장서리 임명소식을 들은 김영삼씨는 『국내외의 모든 여건이 한국의 민주화를 추진하고 고수하고 있으므로 장래에 대한 불안은 신념의 결여에서 오는 기우』라며 별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다.
군 스스로 전장군의 중정부장 임명을 정권인수작업의 착수로 그 당시 생각했던지에 대해서는 주도세력간에도 견해가 분분하다.
당시 보안사대공처장이었던 이학봉씨는 『만일 당시 군이 명예스럽게 물러설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 있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라며 『당시 3김씨가 군을 자신과의 이해관계에서만 본 것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함께 보안사에 근무했던 H씨는 『계엄 하에서 정보기관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보부장서리를 겸한 것은 정치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며 『군의 속셈은 중정의 막대한 예산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이씨도 이런 측면을 부인하지 않았다. 군이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당장 자금이 급하더라는 것이다. 일반 사회에 생소한 군이 갑자기 기업체에 손을 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직성 경비가 많은 국방예산에 손을 댄다는 것은 더구나 어려웠기 때문이다.그 런 의미에서 자금줄 확보를 위해 중정을 맡았다는 말도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닌 것 같다.
또 그 배경에는 군이 꼭 정권을 잡아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더라도 군의 전체적 흐름이 『우리가 결국 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쪽으로 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당시 정보처장이었던 권정달씨는 『당시 군부의 인식은 굳이 표현하자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돈주머니를 발견한 보통사람의 갈등 또는 심경 같은 것이었다』고 비유했다.
주머니를 주우려니 꺼림칙하고 그대로 두고 가자니 아깝고…. 군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힘이 군 쪽으로 끌려오는 듯한 조짐이 도처에 역력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군은 정국의 추이를 단순히 「구국의 일념」보다 다른 차원에서 지켜보았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 정권과 관련한 무수한 도상연습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김영삼씨를 비롯, 3김 중 한 명을 업거나 최규하 대통령 또는 신현확 총리를 모시는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80년 초 3김의 첨예한 경쟁을 지켜보고 최규하 대통령을 모시고 일하는 과정에서 군부의 생각은 점점 달라졌다.
신군부의 핵심세력들은 당시 「글라이스틴」이 평했다고 하는 『김종필씨는 너무 부패했고, 김영삼씨는 무능하고, 김대중씨는 위험하다』는 말이 사실은 군부 내에서 이루어진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서 취임 후 보름만인 4월29일 전두환 중정부장서리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공식 간담회를 갖고 정치현안에 대해 처음으로 견해를 밝혔다.

<군내분위기 차츰 변화>
그는 『계엄 하이기 때문에 포고령이나 법에 위반되는 자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관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면서 『나의 겸직이 정치발전일정에 차질을 초래한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전부장서리는 『최대통령으로부터 난국을 슬기롭게 수습할 수 있도록 정보부 기능을 정상화하라는 분부를 받았다』고 밝히고 『내가 하는 일은 정치발전 일정이나 개헌문제 같은 정치문제와는 무관하며 사회안정과 나라의 울타리를 튼튼히 하는 일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12·12사건을 계기로 한미간에 다소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완전히 해소됐으며 자신의 중정부장 겸직에 대한 미국 측의 불만표시설에 대해 『우리의 최대 우호국인 미국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불만을 표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저지르고 한미 신뢰관계를 파괴해야될 이유가 있는가』고 반문했다.
이날 간담회에 이어 전장군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K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군인이 어떻게 정권을 잡나. 지금은 5·16때와는 달라 경제도 커지고 사회가 다양해져 군인이 설사 정권을 잡는다해도 다스리기 어렵다. 정권 잡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말했다.
노태우 수경사령관도 80년 초부터 다양하게 사람들을 만나 비슷한 말을 하고 다녔다.
노사령관은 주로 언론계 인사들을 만나 12·12에 관한 신군부의 입장과 배경을 설명하고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군이 정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군 내부의 정화노력과 효율적인 안보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군기법 제정 이후 군대내부사정이 거의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당시 많은 국민들은 군을 잘 몰랐고 노장군은 그런 의미에서 군의 실체를 알리고 민간의 이해를 넓히는데 앞장선 셈이었다.
그때 전·노장군을 만난 언론계 인사들은 대체로 전장군이 고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하게 솔직하고 거침없이 얘기하는데 반해 노장군은 신중하고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등 상당히 정치적이라는 느낌을 가졌으며 둘 다 정권욕이 없음을 강조하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린들 못할게 뭐냐"
그러나 「3 장군」과는 달리 이들을 받치고있던 대령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깊숙이 정권인수를 위한 논의가 일찍부터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국보위는 바로 그들의 일관된 작업의 산물이라는 얘기가 사실과 가깝다.
대령들은 80년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40대에 정권을 잡았는데 우린들 못할 것이 무어냐』는 얘기를 공·사석에서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4월 들어 사북사태가 나고 학원이 점차 시끄러워지고 3김의 경쟁에 국민들이 다소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이 조성되자 이들의 모임과 토론은 더욱 활발해졌다.
보안사의 권정달·허화평·허삼수·이학봉 대령 등은 최광수 실장·서기원 공보·이원홍 민원수석 등 청와대 참모들과 술자리를 마련, 최대통령의 지도력 빈곤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 대령들은 각자 연줄을 통해 각계 인사들을 만나 이럴 때 군이 어떻게 해야할 것이냐를 묻고 다녔다.
이들의 정부관계자 및 각계 인사와의 접촉은 지혜를 구하자는 측면도 있었지만 결국 군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소박한 의미의 역사의식과 정의감에 대한 열변들이 터져나왔다.
이런 과정에서 일부 청와대참모들은 대령들에게 『대통령은 제도다. 비록 최대통령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제도는 존중해야한다』고 거의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으나 두드러지게 군의 입장을 이해하고 군의 편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진희 당시 서울신문주필과 허문도 당시 주일공보관이었다.
이진희씨를 만난 권정달 보안사정보처장은 이씨에게 정국의 장래와 군의 역할에 관해 묻고 이씨로부터 상당히 고무적인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어쨌든 이씨는 4월21일자 서울신문에 『역사의 무대가 바뀌고있다』는 시논을 통해 처음으로 군의 전면등장이 불가피함을 언론을 통해 주장했다.
이씨는 그 칼럼에서 『설사 정치발전 일정이 순조롭게 이행되더라도 새로운 정부의 발족이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고 함축하지 못하는 한 과도기적 상황의 연장이라는 시대사적 한계는 여전히 못 벗어난다』며 『따라서 우리가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정치발전 일정이 어떻게 되고 새 정부의 대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80년대 이후의 새 시대가 함축하는 의미와 민족사적 진로의 향방을 주도한 새 엘리트층의 등장』이라고 말해 군부의 등장을 촉구했다.
그후 이씨는 MBC·경향신문 사장으로 전격 발탁되고 문공장관·서울신문사장을 거치면서 제5공화국에서 체제홍보의 주요역할을 담당했다.
허문도씨가 신군부와 접촉한 과정도 흥미롭다. 동경대에서 명치유신을 연구한 허씨는 2월 초 공보관회의차 서울에 와 전장군과 가깝던 고 박정희대통령의 측근 소개로 전두환 장군을 처음 만났다.

<허씨의 열변에 공감>
허씨가 전장군에게 한 주장은 주군을 죽인 김재규를 일부에서 달리 평가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3김씨나 최규하 대통령 가지고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나라의 기둥은 군이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소위 힘의 바탕 없이는 새 질서가 창출되지 못하며 지금 새 질서를 세우지 않으면 한국은 브라질이나 그리스가 되고 말 것이라고 열변을 토해냈다.
이에 대해 전장군은 이해와 공감을 표시하면서 『공부 잘했다』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허씨가 일본으로 돌아가 근무를 계속하고 있던 중 4월 14일 전장군이 중정부장서리로 임명되면서 동경으로 전화를 해왔다고 한다.
전장군은 『도와달라』고 했고 허씨는 『알겠습니다』는 단 한마디로 통화를 끝냈다. 허씨는 다음날 가족을 그대로 둔 채 바로 서울로 날아와 중정부장 비서실장을 맡게됐다. 허씨는 다시 전장군을 만났을 때 전장군이 3김씨에 대한 생각을 상당히 정리해놓고 있었지만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은 없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사회혼란이 불가피하게 그에게 헤게모니를 선택하게 했다는 것이 허씨의 설명이다.
그 즈음 많은 대학교수들도 대령들의 접촉을 받았는데 대체로 군이 나서야된다는 쪽과 군의 등장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양론으로 갈렸었다고 K교수는 증언했다.
K교수는 『집권을 위해 사회불안이 고조되기를 바랐던 세력이 군 내부에 있었는지는 모르나 일부러 혼란을 조장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시끄러운 데서 구실을 잡은 것으로 결국 정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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