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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공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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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여자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일본 유력 일간지 여성 기자 A의 얘기에 발끈 화가 났다. 그의 회사엔 경찰기자 중에서 여자가 거의 없다고 했다. 경찰기자는 밤에도 취재를 다녀야 하는데, 여자 기자는 성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배제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이상했다. 밤 취재는 경찰기자만 하는 게 아니다. 또 가해자 측을 처벌할 생각은 않고 피해자를 업무에서 빼버리다니. 여자 기자들은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로 특정 포지션에서 배제되는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맞아.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더라고.”

체념한 듯한 A의 말을 듣는 순간 “왜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느냐”고 따지려던 생각을 잠시 주저하게 됐다. 일본 특유의 ‘공기(空氣)를 읽는 문화’가 여기에도 작용한 것이리라.

일본에는 집단이나 무리에서 형성된 분위기인 ‘공기’를 읽고 이에 따라야 한다는 문화가 있다. 공기를 읽지 못하고 ‘튀는 행동’을 했을 땐 이지메(집단 따돌림) 등 견디기 힘든 보복이 돌아온다. ‘질서와 안정’을 중요시하는 일본 사회에선 공기에 잘 스며드는 것만큼 중요한 덕목은 없기 때문이다. 평론가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공기’란 “엄청난 절대권력을 가진 요괴”이며 “저항하는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초능력”이라고 규정했다.

일본에선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는 미투(#Metoo) 움직임이 있었지만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30대 작가가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직장 시절 경험담을 고백한 게 발단이 됐다. 스승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극작가, 취업 활동 중 모욕적 발언을 들었다는 정치 논객 등이 미투 대열에 합류했지만, 정작 힘 있는 주류 사회로까지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곳의 ‘공기’는 피해자의 고백이 변화시키기에는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용기 있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공기’가 마련돼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지현 검사가 성폭력 피해를 이제야 공개적으로 밝힌 것도 “나쁜 놈이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이전보다 강해졌기 때문 아닐까. 마찬가지 이유로 성폭력에 관대한 공기를 읽고 침묵하는 A를 비난만 할 수도, 투사가 되라고 등을 떠밀 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또렷해진 게 있었다. 용기 있는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공기’를 만드는 데 주저해선 안 된다는 것, “맞아”라고 공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를 비겁자나 기회주의자로 폄훼해선 공기를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