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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부실투성이로 첫발 뗀 존엄사법 대폭 손질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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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회복 가능성이 없는 임종 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품위 있는 ‘이별’을 도와주는 ‘연명의료결정법(일명 존엄사법)’이 어제 시행됐다. 한 해 5만 명에 이르는 연명의료 환자가 합법적으로 존엄사를 택할 수 있는 ‘웰다잉(well-dying)’의 길이 열린 것이다. 연명의료란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 투여 등 네 가지 의료행위를 말한다. 말기 환자가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하거나 건강한 사람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내면 적용된다.

첫발은 뗐지만 곳곳에서 준비 부실이 드러나 걱정이다. 1997년 서울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20여 년 동안의 논쟁, 법 통과 후 2년간의 유예를 거쳤는데도 허점투성이다. 무엇보다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한 의료기관이 60곳에 불과한 게 문제다. 병원이 연명 중단 심사를 맡을 윤리위원회를 구성해야 하지만 의무가 아니다 보니 인력·비용 문제를 들어 외면했다. 위원장 1명을 포함해 5명 이상으로 구성하는 윤리위에 2명 이상은 종교·법조·윤리 전문가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중소 병원은 물론 강북삼성 등 상급종합병원 중 절반이 모른 채 한 것이다. 규모별 구성 의무화나 공용윤리위원회 효율화 등 보완이 필요하다.

사전의료의향서 등록 의료기관이 전국에 49개뿐인 것도 문제다. 광주·세종·제주는 한 곳도 없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절차도 간소화해야 한다. 연명 중단 가족관계 확인 때 증조부나 증손까지 포함하는 게 대표적이다. 특히 의사들이 판단 착오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방어적 진료를 하지 않도록 처벌조항을 유예할 필요가 있다. 국회는 관련 개정안이 상정돼 있으니 조속히 처리하기 바란다. 과연 그동안 무슨 준비를 했단 말인가. 탁상행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더불어 호스피스 시설 이용률(17%)을 미국·영국의 50% 수준으로 높이도록 인프라도 확충해야 한다. 이런 총체적 뒷받침이 따라야 웰다잉 문화가 확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