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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대중들로 패션 민주화 진행 중 … ‘보그’가 정해주는 관념적인 멋 안 통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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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호 21면

롱패딩 히트시킨 김창수 F&F 대표

김창수 대표는 ’패션 브랜드는 입는 사람의 철학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김창수 대표는 ’패션 브랜드는 입는 사람의 철학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16세기 신대륙을 밟은 에르난 코르테스는 자신의 가축에 십자가 세 개를 찍어 소유권을 표시(Branding)했다. 하지만 현대의 사업가들은 이 낙인을 재화로 끌어올렸다. 소재와 제작방식이 완벽히 같아도 어떤 상표가 붙느냐에 따라 물건값은 달라진다. 김창수(57) F&F 대표는 1987년부터 아트박스·베네통 등 해외 및 고유 브랜드 20여개를 키운 브랜딩 전문가다. 최신 성공작은 지난해 롱패딩 열풍의 승자인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이다. 디스커버리는 아웃도어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라는 말이 나오던 2012년 출범해 지난해 매출 3300억원을 올렸다. 지난달 말 서울 역삼동 F&F 사옥에서 만난 김 대표는 “패션잡지 보그가 정해주는 난해하고 관념적인 엘리트 패션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온라인의 대중, 소셜미디어가 검증한 멋을 받아들인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브랜드는 가치를 공유하는 것 #난해한 엘리트 패션 시대 지나 #속도 빠르고 멋진 포르셰 자동차 #자율주행 시대에 무슨 의미 있나 #K패션도 한류의 기술·소통 갖춰 #10년 뒤 패션 메카는 서울이 될 것

왜 디스커버리 의류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나.
여성성을 중시하는 패션 사업은 해볼만큼 했다. 이젠 다른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는데 옷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2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 나온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삶에 들어오고 있고 패션에도 이를 끌어 들어야 한다. 구글이나 삼성이 세계적인 브랜드지만, 그렇다고 구글 옷, 삼성 옷을 만들면 과연 잘 팔릴까. 삶에 대한 호기심을 내세우는 디스커버리의 성격이 내 의도와 잘 맞았다.
어두운 전망을 딛고 성공했다.
7~8개 브랜드가 경합 중이었으니 포화 상태였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브랜드는 최대 3~4개다. 등산복으로 갔으면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목표로 한 것은 라이프스타일 웨어였다. 분야가 다르다. 패션에 시대를 반영한 것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패션은 ‘이렇게 바뀌고 싶다’는 마음을 옷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패션 브랜드는 이런 가치를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무슨 의미인가.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의 멋은 포르셰다. 경쟁에서 이기고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려면 속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자율주행차 시대에 속도가 무슨 의미가 있나. 마력과 속도는 흘러간 얘기가 된다. 정확성과 편리함, 안전함이 멋이다. 관념이 만들어낸 멋이 아닌 삶이 만들어내는 멋이 통하는 시대다. 왜 프라다는 팔리지 않고 롱패딩이 팔릴까.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이해하기 싫은 것을 강요하는 것을 더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패션잡지 보그가 정해주는 멋이 아닌 온라인의 대중, 소셜미디어가 검증하는 멋을 받아들인다. 패션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다. 

F&F는 현재 디스커버리 외에도 MLB, 바닐라코 등의 브랜드를 갖고 있으며 연간 매출은 약 6000억원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은 배낭 등 소품 위주의 패션 사업을 시도한 적은 있지만, 본격적인 의류 사업은 F&F가 한국에서 처음 시도했다. 브랜드 계약은 2027년까지고 이후 연장이 가능하다. 중국에도 디스커버리 의류 라이센스 사업자가 있지만 한국 디스커버리와는 관련이 없다.

브랜드를 만드는 철학이 있나.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이 브랜드의 핵심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다. 둘째는 시대에 따라 이 핵심가치를 표현하는 방법은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젠 핵심가치를 강요하는 시대에서 공유하는 시대로 넘어왔다.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은 조금 강요 같지 않나. 이젠 ‘두 잇’(Do it)이 좀 더 맞는 것 같다. 게다가 변화는 점점 가속화된다. 이게 즐겁지만, 또 즐겁지만은 않다. 기대고 싶고, 변치 않지만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브랜드가 필요하다.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이 롱패딩 열풍에서 크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물량 조절에 성공해서다. 지난 겨울 시즌을 앞두고 패션 브랜드들은 모두 롱패딩 유행을 예상하고 준비했다. 대박 아이템을 예측하고 그에 맞춰 물량을 준비하는 것은 패션업체의 오랜 과제다. 특히 겨울 외투는 잘 팔린다고 바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길게는 3년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 날씨는 물론, 사회적·정치적 분위기, 유행하는 대중문화 등 고려할 변수가 많다. 각종 충전재(오리·거위털 등)는 미리 확보하지 않으면 필요할 때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거위털을 언제 샀는지에 따라 수익 차가 크다. 제품을 만들 공장 확보에도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이번 롱패딩 유행으로 패션 브랜드들은 때아닌 제작업체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디스커버리 마케팅팀 홍미혜 차장은 “다운팀은 1년 내내 여러 업체의 가격 등락을 봐가며 소재를 사고 제작 라인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디스커버리가 롱패딩에 집중한 데는 드라마 ‘도깨비’가 한몫했다. 지난해 초 광고 모델인 공유가 입고 나오면서 문의가 많았지만, 시즌이 끝나가던 시점이라 팔 물건이 없었다. 지난해 7월 롱패딩 사전 예약 행사에서 준비한 물량(2만장)이 순식간에 동이 난 것을 보고 F&F는 전년 대비 7배에 달하는 물량(약 30만장)을 준비해 모두 팔았다.

이번에는 예측이 맞아떨어졌지만 준비한 만큼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막대한 손해로 이어진다. ‘재고를 남기기보다 차라리 없어서 못 파는 편이 낫다’는 말도 이래서 나온다. 올해도 롱패딩에 준하는 대박 아이템이 나올까. 업계는 지난해 시작된 테니스용품 유행에 정현 선수 효과가 더해져 피케 셔츠와 테니스화, 테니스 스커트 등이 ‘국민 패션 아이템’에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아웃도어 업체는 블루종(항공점퍼·아노락·바람막이)의 인기를 기대하고 있다. 봄·가을 50만장 판매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디스커버리를 비롯해 브랜드마다 블루종 유행에 대비하고 있지만 예상대로 풀릴지는 미지수다.

한국 패션업계가 어렵다는 얘기가 많다.
전혀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희망적이다. K웨이브(한류)에는 새로운 기술과 이질적인 것을 합하는 것이 많이 들어가 있다. 화장품도 유럽 화장품에 없던 쿠션파운데이션 기술이 주목받았고, 방탄소년단(BTS)은 팬과의 소통, 퍼포먼스와 같은 새로운 기술로 승부했다. K패션도 이걸 잘한다. 긴 옷이 유행하는 건 세계적 현상이지만 K패션은 훨씬 더 편하고 멋있고 저렴한 롱패딩을 만들어냈다. 한국 패션 시장은 이미 40조원이 넘었다. 국민소득 대비 이렇게 옷에 많이 지출하는 나라는 없다. 롱패딩 유행처럼 뉴스에 나올 정도의 ‘패션 현상’이 있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패션을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 많은 나라에서 살아있는 패션이 나온다. 그래서 10년 뒤 세계 패션의 메카는 서울이 될 것이다.

김창수 F&F 대표. 동성고·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92년 창업한 F&F이라는 회사명은 패션(Fashion)과 시대에 따라 변하는 규정되지 않는 또 하나의 ‘에프’를 조합한 것. 초기엔 패션에 대한 촉(Flair), 재미(Fun), 기능(Function) 등의 뜻으로 썼는데, 현재는 미래(Future)라고 한다. 삼성출판사 창업주인 김봉규 전 대표의 차남이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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