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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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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5·18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 광주사태, 국보위발족을 거쳐 제5공화국을 출범시킬 때까지의 주역은 3장군과 대령들이었다.
모든 일이 치밀한 계획아래 차근차근 추진되지도 않았으면서 정권을 송두리째 인수하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을 주역들은 대체로 시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곧 잘 설명했다.
이들의 행위가 정권 찬탈을 노린 전형적인 쿠데타였다고 보는 시각이 여전히 있지만 주역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처음부터 정권자체를 노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전두환전대통령이나 노태우대통령이 평소 「국혼상승」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고 그들의 등장과 집권이 마치 국운 덕분인양 얘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특히 그 시점에 육사정규1기(11기)와 대령들을 주축으로 한 후배들이 똘똘 뭉쳐 군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어쨌든 12·12로 부상한 3강군중 전두환소장은 7년반의 대통렴직을 마치고 노태우소장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으며 정호용소장은 참모총장·국방장관을 거쳐 뒤늦게 노대통령 밑에서 정계일선에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친구끼리 한 나라의 정권을 최소한 12년여 교대로 쥐는 희귀한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12·12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3장군의 역할과 우정, 그리고 세상에 갈 알려지지 않은 그들간의 갈등및 역학관계는 단순한 일화로만 넘길수 없을 것 같다.

<김복동집에 자주 모여>
3장군, 나아가 육사11기의 성장과정과 그들의 인간관계를 더듬자면 육사시절부터로 올라가야 한다.
육사 11기들은 모두 동란 중 나라가 피폐하고 가난이 극도에 달했던 시절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충정반, 국비로 공부할 수 있다는 혜택반의 동기로 입학한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우리 실정에 생소한 미국웨스트포인트식의 신교육을 받아오면서 보통사람들은 참기 어려운 고초도 겪고, 또 선각자연하는 우월감도 갖는 분위기 속에서 교육받아봤다.
11기는 육사에 임학해서부터 서구적 개념의 치열한 경쟁사회를 가장 앞서 경험했다.
2백명이 입교해 1백56명이 졸업했지만 교육기간중의 치열한 경쟁과 자유시간이 없는 학과운영 때문에 재학 중 특별히 친해지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더욱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이 스스럼없이 친해진다는 것은 어려웠으며 대개 출신지역별로 교우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대구출신의 동기생들끼리 비교적 자주 만나 친하게 지냈는데 그들이 바로 경북고 출신의 노태우·정호용·김복동, 대구공고 출신의 전두환, 대구 능인고 출신의 권익현생도였다.
이들은 방학 때면 대구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대구 중심가에 살던 김복동생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가난해 김복동생도집이 자연스럽게 아지트가 되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당시 이들은 김복동 생도집에 가면 먹을 것도 있고, 또 가정 분위기도 좋아 자주 찾아갔다. 그런 가운데 노태우생도는 당시 경북여고에 다니던 김생도의 여동생 김옥숙양과 나중에 배필을 맺게된다.
이들은 육사 졸업 후 임관되어 일제히 전방으로 갔다가 당시 부패의 대명사처럼 되어있던 논산훈련소 구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군은 정규4년제 교육을 받은 11기를 군내 방부제 역할을 하게끔 정책인사를 했고 그로 인해 11기의 프라이드는 대단했다. 가는 부대마다 부패했다고 보이는 선배군인들과 마찰이 일어났다.
논산훈련소 구대장을 마친 11기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하나하나 각 병과대로 배속을 받아갔는데 곧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마침 박정희소장의 전속부관이 11기생인 손영길대위였으며 전두환·최성택대위는 최고회의 비서관으로 발탁됐다.이때부터 11기는 박정희최고회의의장으로부터 군부내의 소금으로 인정을 받았고 n기내에서의 이른바 선두그룹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선두그룹들은 대체로 경호실·수도경비사·방첩대·전투단 (특전사)등에 배속됐다 김종필씨가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난 뒤 정보부 요원으로 차출돼 갔다.
전두환·김복동·손영길·최성택씨등이 먼저 소령으로 진급했고 노태우·권익현·정호용씨 등은 한발씩 뒤떨어져 진급했지만 11기내의 핵심 그룹을 형성했다.

<「7·6사건」도 주도>
정보부에서 전두환소령은 인사과장, 김복동소령은 학원과장, 권익현대위는 보안과장, 노태우대위는 정보과장을 맡았으며 정호용대위는 이들 4명보다 보직면에서 약간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이들은 정보부시절 김종필전부장과 그를 둘러싼 정보부 간부들이 부패했다 하여 이들의 처벌을 상부에 건의했으며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JP의 4대의혹사건을 겨냥해 관련자와 부패분자들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한 이른바 「7· 6사건」을 일으켰다.
「7·6사건」은 공교롭게도 정승화 당시 방첩부대장이 수사했으며 이들을 구속할 것까지 고려했으나 박정희의장이 그들의 행동을 정의감에 넘친 장교들의 우국충정의 발로 정도로 받아들여 무사했다.
이때부터 영관급 장교로서 군부내 세력을 형성한 선두그룹들은 권력주변에 있다보니 진급도 빨랐고 정치도 어깨 너머로 조금씩 배워 좋게 말하면 친목단체고, 달리 표현하면 사조직을 조금씩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11기는 「북극성회」라는 정규 1기이후의 육사동창회를 조직, 전두환·노태우·김복동·권익현씨 등이 번갈아 회장을 맡았고 또 「하나회」(일심회)라 하여 육사출신 중 비교적 똑똑하다는 사람들을 골라 「뭉친 중에 또 뭉친」 세력을 형성해갔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11기 중심의 육사출신 세력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 윤필용사건 이었다.
이 사건은 박종규 당시 경호실장과 이후락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간의 파워 게임이 사건으로 비화했다는 설도 있으나 아무튼 당시 군부의 한 구심점이었던 윤필용씨의 퇴장을 가져왔고, 윤필용씨의 우산 밑에서 도약하던 11기이후 정규 육사출신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당시 윤강군사건으로 연대장이었던 권익현대령과 윤장군의 수경사 참모장이었던 손영길준장이 군법희의에 회부되고 다른 11기 핵심들이 강창성보안사령관 측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윤강군이 방첩부대장(보안사 전신)으로 있을때 노태우중렴은 정보과장,권익현중렴은 대공과장을 맡았고, 윤장군이 주월사령관으로 있을 때 11기 선두그룹 대부분이 월남에서 연대장을 지냈다.
당시 윤장군사건의 군법회의 판결문(73년4월28일)은 『본건 피고인들이 범한 죄과는 군내부에 맹종걱으로 추종·아부하는 장교들을 규합하여 사조직을 결성하고 군의명맥인 지휘계통을 문란케함으로써 군전투력을 좀먹었다』고 지적하고『피고인들은 그들 사조직내에 계열화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진급(특진)·보직 및 해외파견 등에 파격적 특혜를 주도록 각양으로 압력을 가하여 대다수 강병의 사기를 저하시켰을 뿐 아니라…』라고 밝혔다.

<"궁정동 소식에 통곡">
이 판결문은 윤장군과 당시 윤장군을 따르던 정규 육사출신 엘리트 장교들의 위상에 노골적인 제동을 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윤장군사건이 얼마 안가 잠잠해지고「하나회」같은 정규 육사출신모임이 민정이양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양해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나자 11기들은 다시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중용되었다.
동기생 중 손영길·김복동·최성택씨와 더불어 가장 먼저 장군이 된 전두환장군은 경호실 행정·작전차장보, ○사단장을 거쳐 10·26당시국군보안사령관이었고 노태우소장은 전장군의 후임으로 작전차장보를 거쳐 △사단장이었으며 김복동씨는 작전차장보, 정호용씨는 후방 사단장이었다.
10· 26은 이들에게 예기치 않은 운명적 선택을 강요했다. 그당시 전두환장군이 보안사령관 자리에 있었고 이들이 오랫동안 이른바 「사조직」으로 결속해온 군부의 인맥이새로운 지평을 열게 한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혜택도 받고, 또 내심 그를 존경해온 이들은 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대통령에게 총을 겨누고 그런 사건의 옆자리에 정승화참모총장이 있었다는사실에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전두환장군은 최근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10·26 당시를 회상하면서『사실은 10월27일 바로 정승화 당시 참모총장을 체포, 구속하려 했었다』고 말했다.
전전대통령은 그렇게 하려고 보안사 참모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순간 계엄사령관인 그를 구속했을 때 군내부에 생길 기강의 문제, 대통렁이 서거하고 참모총장마저 구속된 상황을 북한이 오판할 가능성, 참모총장의 구속을 불안해할 국민들의 심리 등을 고려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 명령을 취소했었다고 밝혔다.
또 노태우장군은 10·26소식을 듣고 김재규의 행위를 자식이 부모를 죽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군부대에서 대성통곡했었다고 측근이 밝힌바 있다.
이같은 인식을 갖고 있던 11기이하 군부 엘리트들의 눈에 그후 취한 정승화총장의 행동과 김재규를 보는 일부 야당세력들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김재규의 처리에 대해 다른 해석이나 가치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이었던 것 같다.
11기이후 똘똘뭉쳐 아무리 박정희대통령이 독재자라 하더라도 심복이 저격한 것은 달리 해석할 수 없으며 김재규가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정승화총장의 태도가 시간이 갈수록 모호해진다고 느끼자 이들의 선택은 점점 좁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후일 노장군은 얘기한바 있다.
당시 김재규를 수사하고 재판한 관계자들의 얘기에 의하면 김재규는 곧잘 『바깥 분위기를 아느냐』 『당신네 상관의 뜻을 아느냐』고 말해 김재규가 정승화총장으로부터 뭔가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장태완수경사령관을 비롯, 서울주변 군부대의 수뇌가 모두 김재규와 가까운 사람들이어서 이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상황은 바뀔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보안사 주변을 짓눌렀고, 때마침 정총장이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전사령관의 동해안쪽 부대장 전출을 상의했다는 말이 전해지자 11기들은 점점 더 정총장과의 대립관계를 「살기 위한 싸움」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정규육사 출신들은 김재규의 재판을 어떤 식으로든 진행시키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김재규재판에 관한한 명분싸움에서는 질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마련했다.
이들의 입강에서 본 12·12사태의 배경은 이같은 것이었다.12·12 주역들은 자기들이 12·12를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도 생겼고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12· 12는 군내부의 신구 두세력간에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고 이기면 군내부의 인사정체해소 효과뿐 아니라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목표가 너무 빤히 보였기때문에 물러설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11기를 중심으로 한 군부엘리트들은 평소 11기 이전 선배들을 거추장스런 존재로 보아왔고 언젠가는 자리를 내주도록 해야한다는데 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선배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것은 오랜 기간 다져온 군부내 엘리트들의 공감대를 믿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 이유에서 12·12를 일으킨 신군부의 의도가 「군부내 자정」노력에 있었다고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12·12에 대한 세상의 눈초리는 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12·12사태로 군부내파워게임에서는 정규 육사출신이 이겼으나 그 방법이 비정상적이었다는 여론 앞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12·12사대 이후 부닥칠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치밀한 계획이 없었다는 것은 곧 여러가지 측면에서 드러났다.

<워싱턴서 계속 제동>
우선 미국이 12·12 주도세력의 전면 등장에 우려와 함께 불쾌감을 표시했다. 워싱턴 당국은 12·12이후군부의 부상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12·12세력이 극단적인 조치로 정권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끔 여러 방향에서 압력을 가해왔다.
미국은 80년1월초 「롤브루크」국무차관보,「레스터·움삼」의원 등을 잇달아 서울에 보내 『우리는 한국정부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민간정부를 계속 유지하고 민간정부가 민주적 정치 절차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의사를 전달했다』고 하는 등 제동을 가했고 80년1월6일「위컴」주한미군사령관을 본국에 불러들여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도세력들은 당장 12·12가 결코 정권을 노린 거사가 아니며 김재규재판을 진행시키고 정승화총장을 의법처리함으로써 군부내의 발전적 변화를 추진한데 불과하다는 쪽으로 대내외에 입장을 해명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군부의 주도적 인물로는 전두환보안사령관겸 합동수사본부장만이 전면에 나타났고 나머지 신군부의 핵심세력은 베일에 가려 있던 상대였다.
정승화쟝군의 체포로 참모총장이 된 이희성계엄사렴관은 80년1월7일 계엄사의 업무보고차 최규하대통령을 찾아가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했으며 전사령관도 함께 최대통령에게 같은 다짐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12·12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점점 커자갔다. 심지어 12·12와 그주도세력들에 대한 각종 유언비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신군부는 적극적인 홍보를 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노태우수경사령관과 정호용특전사령관이 외부에 모습을 나타내고 소외「3강군」으로 불리는 실세가 부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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