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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부패 흠집에도 ‘룰라 향수’ … 브라질 대선 판세 출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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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거꾸로 가는 중남미 정치 시계

10월 대선을 앞 둔 브라질에서 룰라 전 대통령 의 지지자들이 ’룰라는 무죄“라는 포스터를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0월 대선을 앞 둔 브라질에서 룰라 전 대통령 의 지지자들이 ’룰라는 무죄“라는 포스터를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뇌물 항소심 유죄에도 지지율 선두 #최악 장기 경기 침체에 다시 인기 #10년 넘게 이어진 좌파 바람 구심점 #대선 줄잇는 남미 국가 영향 클 듯 #수출 등 대외 여건 예전만 못 해 #재집권해도 위기 타개 미지수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불렸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2) 전 대통령(2003~2010년 재임)이 퇴임한 후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호출되고 있다. 오는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그에게 유권자들이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룰라의 지지율은 34% 정도로, 16%의 지지율을 보이는 극우 성향 자이르 보우소나루 의원(기독교사회당)을 여유롭게 제치고 있다.

문제는 룰라가 브라질 대형 건설사 오데브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며,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항소심에서 징역 12년 1개월의 실형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룰라 또한 “사법 당국이 내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무시했고, 이는 정치탄압”이라며 유엔(UN) 고발을 추진하고 있다.

법정에 서고 있는 옛 지도자를 브라질 국민이 찾는 것은, 삶이 고돼서다.

브라질은 최장 경기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있다. 지난해 이 나라 지니계수(소득 불평등 지수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는 0.5529(한국은 0.4 수준)를 기록했다. 조금씩 개선됐던 수치가 22년 만에 악화로 돌아섰다.

브라질은 룰라 집권 당시엔 세계 8위의 경제 대국에 오르기도 했으며 분배 또한 비교적 고르게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들이 ‘룰라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다.

룰라 개인의 삶에서 우러나온 매력과 카리스마도 무시할 수 없다. 가난한 노동자 출신인 그는 열아홉 살에 야간작업 중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었고, 20대 땐 만삭 아내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아내와 뱃속 아이를 모두 잃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다 1969년 노동조합에 가입하며 노동운동에 눈뜬다. 6년 후 상베르나르두두캄푸 금속 노조위원장으로 뽑혔고, 1978년부터 3년간 이어진 총파업 때는 노동계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80년 노동자당을 창당했다. 2003년, 3수 끝에 대통령이 된 룰라는 신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현실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노선이 다른 이들과도 손을 잡았다. ‘실용주의 좌파’였던 셈이다.

그러나 빈민 구제 정책은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밀어붙였다.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 등을 조건으로 보조금 지급)라는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 빈민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는 왜곡된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5000만여 명(2011년 기준)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다. 그는 87%라는 놀라운 지지율을 유지하며 퇴임할 수 있었다.

룰라 전 대통령 [신화=연합뉴스]

룰라 전 대통령 [신화=연합뉴스]

문제는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지우마 호세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던 때였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작지 않은 브라질은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호세프는 긴축 정책을 펼쳤다. 복지 정책 축소에 지지층은 등을 돌렸다. 부패 관련 조사를 막아달라고 요청한 주요 인사의 부탁을 거절한 탓에 우파 역시 그를 외면했다. 지지층과 반대파 모두 등을 돌리며 호세프는 2016년 탄핵당했다. 의회 동의 없이 국영은행에서 돈을 빌려 국가 재정으로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더 큰 문제는 노동자당의 부패였다. 20~30개 정당이 난립해 있는 정치 현실에서 집권당은 여러 정당과 연정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당이 소수 정당에 뇌물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오데브레시 스캔들’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대형 부패 사건이 줄줄이 터졌다. 검찰은 2014년 수사를 시작해 지금까지 300명가량의 정치인을 기소했다. ‘노동자당을 겨냥한 법정 포퓰리즘’이란 비판도 나왔지만, 국민은 집권당에 배신감을 느꼈다.

호세프 탄핵 이후, 한때 노동자당과 연정했던 중도우파 브라질민주운동당의 미셰우 테메르 부통령이 대통령이 됐지만 곧 한계를 드러냈다. 서민 계층의 반발에도 노동 유연화가 핵심인 노동법 개정을 하고, 국영전력회사를 민영화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지만 최악의 장기침체는 계속됐다. 무엇보다 테메르 본인을 비롯한 우파 정치인들의 엄청난 부정부패가 드러나면서 지지율은 5% 이하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다시 룰라를 찾기 시작했다. 호황기 시절에 대한 향수, 영화 같은 삶을 산 룰라 개인의 매력에 그의 ‘실용주의’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더해져서다.

그러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현재로썬 출마 가능성도 불투명하다. 대법원에 상고한 후 후보로 등록할 순 있지만 법원의 허락이 필요하고, 당선되더라도 유죄가 확정되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해도 브라질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룰라 재임 시절에는 국제 원자재 시장 등이 호황이어서 브라질 경제를 떠받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그와 노동자당에는 ‘새로운 비전’이 뚜렷하지 않다. 청년들은 이 당을 ‘기성 정당’이라 여기고 있다.

이에 좌파는 흔들리고 있다. 룰라가 출마하지 못할 시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면 극우 후보에 밀릴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룰라만큼 인지도 있는 인물이 없다. 좌파로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상황에 빠진 것이다.

중남미 각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브라질 정국에 주목하는 이유는, 룰라가 단순히 그 나라의 ‘인기 있는 전 대통령’을 넘어선 인물이라서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중남미 좌파 정권 바람, 이른바 ‘분홍빛 물결’의 구심점이었다.

코스타리카(2월), 파라과이(4월), 콜롬비아(5월), 멕시코(7월) 등이 줄줄이 대선을 앞둔 올해에도 브라질의 정국 상황은 이들 나라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내년에 대선이 열리는 볼리비아·아르헨티나·우루과이·엘살바도르·과테말라 등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올해를 중남미 미래에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 국가가 심각한 양극화, 치안 불안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남미의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브라질의 룰라가 있는 셈이다.

[S BOX] SF 드라마 ‘3%’ 브라질 현실이 보여요

SF 드라마 ‘3%’

SF 드라마 ‘3%’

한 나라의 현재 분위기를 엿보는 데 영화나 드라마 같은 콘텐트는 좋은 재료다.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SF 드라마 ‘3%’(2016, 시즌1·사진)는 브라질의 현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넷플릭스가 브라질 원작의 판권을 사들여 이 나라에서 이곳 감독과 배우들을 기용해 제작한 드라마로, 현지에선 ‘브라질판 헝거게임’으로 입소문이 나 인기를 끌었다.

작품의 배경은 가난하고 더러운 내륙과 모든 것이 풍족한 유토피아 외해(外海)로 나뉜 암울한 미래 세계다. 누구나 스무 살이 되면 외해로 가는 테스트를 치를 수 있지만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살인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외해로 갈 수 있지만 탈락하면 평생 빈곤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살아남는 이는 오직 3% 뿐이다. 판타지 드라마임에도, 경제 양극화가 극심한 브라질의 현 상황이 겹쳐지는 이유다. 시즌2는 올해 방영될 예정이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웨이스트 랜드’(2010)도 이 나라를 이해하는 데 좋은 텍스트다. 애니메이션에 브라질 역사를 압축적으로 담은 ‘리우 2096’(2013)도 좋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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