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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靑 의견은 커녕 원세훈의 '원'자도 못 꺼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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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대법관, "재판 외압 없었다…행정처 관료화는 사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에서 원세훈의 ‘원’자도 못 꺼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을 지낸 A 전 대법관은 28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2일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 발표 이후 일부 언론이 2015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상고심을 앞두고 법원행정처와 청와대가 교감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서다.

"양승태, 원세훈 이름도 못 꺼냈다" #지논·시큐리티 파일 증거능력이 쟁점 #"梁 대법원장 행정처 관료화는 사실" #"판사들 정치색 강해졌다 생각해"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의 발표 이후 양승태(가운데)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청와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놓고 교감한 게 아니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의 발표 이후 양승태(가운데)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청와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놓고 교감한 게 아니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연합뉴스]

A 전 대법관은 “전원합의체에서 대법원장이 재판장 역할을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당시 전합에서 청와대 의견은커녕, 본인의 견해조차 제대로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어 “쟁점은 이른바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할지 여부였고 이에 대해 대법관 전원이 항소심의 법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론 내린 것”이라고 못 박았다.

당시 전합에 참여한 B 전 대법관도 “당시 전합에서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을 일종의 ‘업무일지’로 봐 증거능력을 인정한 항소심 판단이 맞는지를 놓고 법리 토론을 벌였다”며 “재판에 대한 어떤 외압이나 압력도 없었다”고 말했다. 현직 C대법관도 “전합의 논의 과정을 일일이 공개할 순 없지만 일부 언론에서 제기되는 청와대 교감설과 관련해선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았던 일”이라며 “당시 전합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황당무계한 주장임을 알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전ㆍ현직 대법관이 말하는 법리(法理)는 디지털 증거를 재판의 증거로 인정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은 국정원 댓글사건 당시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5팀 직원 김모씨의 e메일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엔 댓글 활동에서 어떤 주제를 전파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과 사용된 소셜미디어 계정ㆍ비밀번호가 들어있었다.
우리 형사소송법(제313조 1항)은 e메일처럼 직접 구두로 진술하지 않은 증거에 대해선 법정에 나와 ‘내가 작성했다’고 하지 않으면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김씨는 검찰 조사에선 “내가 작성한 게 맞다”고 했다가 법정에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

지난해 8월 법정구속되기 직전 법원에 들어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중앙포토]

지난해 8월 법정구속되기 직전 법원에 들어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중앙포토]

원 전 원장의 1심 재판에선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아 국정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원 전 원장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형소법 제313조 1항에 따른 증거능력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형사소송법 제315조 제2ㆍ3항을 적용해 지논ㆍ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내가 작성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지 않아도 일종의 ‘업무일지’로 간주하면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는 법리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단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옳다”고 판단했다. 단편적인 언론 보도 내용이나 사적인 내용이 뒤섞여 있어 ‘업무일지’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양승태 코트, 관료화됐던 건 사실=전ㆍ현직 대법관들과 법원행정처 관계자들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이전에 비해 관료화됐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A 전 대법관은 “대법관 재직 시절엔 사법행정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과거 법원행정처에 근무할 때 행정처가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보고서로 만든단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조사결과가 사실이겠지만 내가 대법관으로 있을 때 법원행정처에서 이런 보고서가 작성됐단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에 근무했던 D부장판사는 “대법원장의 성향에 맞춰 법원행정처가 움직였던 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장은 ‘무색무취’한 선비형 판사를 원했는데 전임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판사들의 정치색이 강해진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긴 건 맞다”며 “대법원장의 생각이 이렇다 보니 이전과 달리 법원행정처가 정치권이나 청와대는 물론, 법원 내부의 움직임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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