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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이번엔 밀양 참사 … 우리는 안전 후진국에 갇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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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화재 참사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줬다. 29명의 목숨을 앗아 간 충북 제천시 복합상가 화재가 일어난 지 한 달여 만에 거의 ‘판박이’라 할 수 있는 참극이 재연됐다. 급유선이 낚싯배를 추돌해 15명이 숨지는가 하면,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던 미숙아 4명이 병원 과실로 세상을 떠났고, 서울 도심의 숙박업소에서 불이 나 6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모두 최근 한두 달 새 벌어진 일이다.

제천 사고 판박이인 밀양 병원 화재 참극 #‘안전’ 외쳤지만 바뀌지 않은 현실 재확인

밀양 화재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령인 환자들이 많이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큰 인명피해로 이어졌다. 병원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정교한 대응책이 마련돼 있어야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빠져나와 다행히 화를 면한 이들에 따르면 병원 관계자들의 체계적 대응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건물 관리인이 어찌할 바를 몰라 피해를 키운 제천 사건과 흡사하다. 방재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연기가 삽시간에 퍼진 점도 닮은꼴이다. 제천 상가 건물에는 스프링클러가 있었으나 작동되지 않았고, 세종병원에는 아예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건물 규모가 작아 설치 의무가 없었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회의가 부랴부랴 열리고, 행정안전부 장관과 주요 정당 대표들이 앞다퉈 현장으로 달려가고, 대규모 인력이 투입된 수습본부가 만들어진 것도 제천 사건의 복사판이다.

원인은 차차 규명되겠지만 이번 화재에서 연기가 급속히 건물 전체에 퍼진 점으로 미뤄 볼 때 가연성 물건들을 방치해 대규모 희생을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화재·지진 등의 재난 상황에 대한 매뉴얼이 없거나 있어도 허울뿐이었을 것으로 의심된다. 간호사가 대피하라고 소리만 질렀다거나 비상벨이 울렸지만 간병인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생존자 증언이 속속 나온다.

4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다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정부는 행정안전부에서 소방과 방재 부문을 떼어내 국민안전처라는 별도의 부처를 운영하기도 했다. 일제 점검을 하고, 관련 인력을 늘리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정부가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크레인이 시내버스를 덮치고, 산업 현장에서의 떼죽음이 잇따른다. 소방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다중이용시설이 시민의 생명을 노리고 있고, 대피 통로는 막혀 있기 일쑤다.

진짜로 맞서 싸워야 할 ‘생활 적폐’가 곳곳에 쌓여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국민 안전을 정부의 핵심 국정 목표로 삼고 관리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잇따른 참사를 지켜본 국민들은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고귀한 생명들이 한순간에 스러지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여전히 ‘안전 후진국’에 갇혀 살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냉엄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일상의 위험들을 하나씩 정교하게 없애는 데 앞장서야 한다. 국민들이 변해야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구호 외치기와 전시성 행정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