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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알코올이 불쏘시개” … 유독가스에 누운 채 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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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7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남 밀양 세종병원은 5개 진료과목이 있는 종합병원이지만 거동이 불편한 고령·중증 환자가 대부분이어서 인명피해가 유독 컸다. 26일 오전 7시30분부터 화재를 알리는 비상벨이 울렸지만 화재 발화 지점으로 알려진 1층 응급실에서 멀리 떨어진 5~6층에 있는 환자들은 불이 난 이후에도 10분 넘게 병상에 앉아 있었다. 연기가 6층까지 차올랐을 땐 병실 자동문이 열리지 않아 6층에 있던 환자 35명은 꼼짝없이 병실에 갇혀 버렸다.

인명 피해 왜 컸나 #중앙계단이 가스 확산 ‘굴뚝’ 역할 #검은 연기 삽시간에 6층까지 덮쳐 #병실 자동문도 안 열려 환자들 갇혀 #신고 3분 만에 소방대 도착했지만 #1층 화염·연기 휩싸여 진입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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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호에 있던 강서윤(78)씨는 “비상벨이 10분간 울리는데도 간병인이 오작동이라고 해 13명이 모두 병상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다”며 “7시40분쯤 되자 연기가 갑자기 확 차올랐고, 전기가 끊기면서 병실 자동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강씨는 119 소방대원이 손전등을 비추며 병실 자동문을 수동으로 열어주자 빠르게 뛰어나와 계단을 통해 탈출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은 소방대원 등에 업히거나 바닥에 앉은 채로 소방대원들의 손에 이끌려 병실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26일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현장에서 119구조대가 장례식장에 대피해 있던 환자를 인근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 이번 화재로 인한 사망자 대부분은 유독가스로 인해 질식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봉근 기자]

26일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현장에서 119구조대가 장례식장에 대피해 있던 환자를 인근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 이번 화재로 인한 사망자 대부분은 유독가스로 인해 질식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봉근 기자]

2008년 3월 설립된 밀양 세종병원에는 의사 3명, 약사 1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를 합쳐 27명이 근무하고 있다. 환자는 180명이 입원해 있었다. 화재는 이날 오전 7시25분 발생했고, 신고는 오전 7시32분 접수됐다. 소방대원이 신고 3분 만에 도착했을 당시엔 1층이 이미 짙은 연기와 화염에 휩싸여 진입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소방대원은 2층 창문 등을 통해 입원 환자 등을 구조했고, 화재 발생 2시간여 만인 오전 9시29분 큰 불길을 잡고 오전 10시26분 불을 모두 껐다.

소방당국은 “화상으로 숨진 환자는 없고, 대부분 질식사했다”고 발표했다. 화재 발생 직후 중앙계단을 따라 연기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화재 발생 시 연기가 수평 방향으로는 1초에 1∼2m 정도 가지만 수직 방향으로는 1초에 3∼5m까지 급속도로 퍼진다”며 “불이 난 지점의 문만 닫았다면 연소 확대가 덜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화 지점인 응급실에 가연성 물질이 많은 점도 인명피해를 키웠다. 백동현 가천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응급실에 소독용으로 쓰는 알코올 성분과 1층 원무과에서 쓰는 종이 문서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중앙계단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설계가 잘못됐다고 보긴 어렵지만 연기를 실어나르는 통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충북 제천 화재와 달리 건물 외벽은 멀쩡했다. 방화셔터 등이 작동하지 않아 층간 공기 순환이 빨랐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화재 발생 시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유독가스를 마신 탓에 피해가 유달리 컸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최희천 한국열린사이버대 재난소방학과 교수는 “화재 발생 시 가연성 물질이 타면서 유독가스가 발생하는데 심하면 10∼15초만 노출돼도 사람이 정신을 잃는다”고 말했다.

501호에 입원해 있던 이유기(89)씨 역시 간호사와 119 소방대원의 도움으로 병실에서 탈출했지만 연기 질식으로 끝내 사망했다. 이씨의 딸인 홍순열(60)씨는 “어머니가 1층 밖으로 나오자마자 의료진이 심폐소생술을 30분 동안 실시했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며 “얼굴이 검게 그을렸지만 화상 흔적은 없었다”며 오열했다.

유독가스 연기가 퍼진 상황에서 소화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스프링클러도 설치돼 있지 않아 화재를 진압할 만한 시설은 전무했다.

밀양=이은지·홍지유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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