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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시어머니에 2년간 손자 안 보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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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어린 손주를 자주 보여주길 바랐다. 며느리는 어린 도련님에게 존댓말을 쓰게 하고, ‘나는 손주 재롱만 보면 된다’는 시어머니에 반기를 들었다. 며느리는 급기야 시댁에 발길을 끊었고, 그게 2년이 됐다.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 선호빈 감독 부부 #며느리 도리만 강요하는 시집에 반기 #직접 겪은 고부갈등 다큐멘터리 제작

‘B급 며느리’는 선호빈(37) 감독과 김진영(36)씨 부부가 2013년부터 겪은 고부갈등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생활 밀착형 갈등이 생생하게 담겨 기혼자, 특히 여성들이 깊이 공감한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이 겪는 고부갈등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를 만든 선호빈 감독과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아내 김진영 씨. 김상선 기자

자신이 겪는 고부갈등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를 만든 선호빈 감독과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아내 김진영 씨. 김상선 기자

독특한 제목은 관객을 도발하려는 선 감독의 아이디어다. 시어머니 조경숙씨는 이 제목을 듣고 “B급이나 되냐? F급이지”라고 말했다. 낙천적이고 명랑한 진영씨는 정말 B급 며느리일까. “이 영화의 제 첫 내레이션도 ‘나는 이상한 여자와 결혼했다’거든요. 많은 부부가 싸울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너 이상하다’예요. 부부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제각각이니까요. 보는 이의 마음 한 편을 찌르려는 전략입니다(웃음).” 선 감독의 말이다.

진영씨(왼쪽)와 선 감독.

진영씨(왼쪽)와 선 감독.

고려대 인문학부 동문인 부부는 진영씨가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한량 같은 ‘밤의 대학생’ 선배과 모범생 후배는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사귀었다. 진영씨는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앞길이 창창한 딸이었다. 아버지 뜻에 따라 사법시험을 봤다가 1학년에 덜컥 1차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꿈은 아니었다.

“의대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학과보단 대학 명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웠죠. 그러다 남편을 만났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영화 일을 당당히 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어요. 대화도 잘 통해 갈등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짝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부모 말에 대거리 한번 못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손자 해준이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어머니 조경숙씨.

손자 해준이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어머니 조경숙씨.

아들 해준이 태어나자 손주를 ‘죽도록 좋아하시는’ 시부모의 요구는 많아졌다. “아이의 엄마인 제가 있기에 아이도 존재한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랐어요. 시어머니가 자식과 손주를 끔찍이 사랑할수록 며느리는 도구화돼요. ‘내 아들, 손주를 잘 보살펴 때 되면 내 앞에 대령하면 된다’는 식으로요. 여성의 권리와 평등한 인간관계를 배운 저 같은 젊은 며느리는 비참함을 느끼죠.”

진영씨가 다른 며느리와 다른 점은 ‘들이받았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육을 받은 진영씨는 "선을 지켜달라"는 등 시댁에 솔직한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해준이를 2년 간 시댁에 데려가지 않았다. 명절에도, 부모님 생일에도 가지 않았다. 시부모님의 부재중 전화 수십통이 쌓였다. 손주가 그리운 시어머니는 아들이 찍어온 손자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사실 진영씨도 편하진 않았다. 편두통이 심해졌고 살이 쏙 빠졌다. "결혼 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는데"라며 우는 날도 많았다. "남편이 혼자 시집에 다녀오면 부모님께 받은 스트레스를 내비쳐요. 함께 기르는 고양이를 구박한다거나. 하지만 불편해도 어쩔 수 없었어요."

해준이를 시할머니댁에 보내는 진영씨.

해준이를 시할머니댁에 보내는 진영씨.

이 다큐는 따지고 드는 며느리 앞에서 말을 바꾸는 시어머니 때문에 증거 채집용으로 영상을 찍다가 작품으로 만들게 됐다. 촬영 분량을 본 동료 감독들은 "재밌으니 이걸 다큐로 만들어보라"고 다독였다. 선 감독은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피칭(제작 단계에 있는 작품의 투자를 위해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나섰다.

1년간 촬영을 거부하던 부모님도 아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편집을 하면서 가족 누구라도 밉상으로 보일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흥미로운 건 완성본을 본 분들의 반응이 다 다르다는 점이에요. '이 정도면 좋은 시댁'이라는 분도 있고 '부모님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분도 있고요."

부부는 "이 고부갈등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의 보편적 문제임"을 힘줘 말했다. 각 가족 구성원에게 책임만을 요구하는 과거 세대와 개인의 욕망과 신념이 중요한 젊은 세대의 갈등이라는 이야기다. “시댁 어른 누구도 제게 ‘왜 그렇게 화가 났니’ 라고 묻지 않으셨어요. 그저 ‘어떻게 어린 며느리가 대들 수가 있냐’며 가부장적 위계를 강요할 뿐이었죠. 많은 며느리가 이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친정 욕보이지 않고,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에 불만을 삭여요.” 진영씨는 “원체 다른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려는 욕심이 없다”며 “무심하고 당돌한 성정이 큰 무기였다”고 돌이켰다.

선 감독 역시 프리랜서로 영상 제작 아르바이트를 했던 어려움을 다큐에 녹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생활비가 모자라는 현실. 그는 "사회 진출의 기회는 부족하고 생각은 트인 젊은 세대들은 가정과 사회 안팎으로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겪는 고부갈등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를 만든 선호빈 감독과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아내 김진영 씨. 김상선 기자

자신이 겪는 고부갈등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를 만든 선호빈 감독과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아내 김진영 씨. 김상선 기자

선 감독 부부와 시부모는 전쟁 같은 시간을 겪으며 한층 성장했다. 2주가 안 돼 울며 전화를 걸어오던 시어머니도 이젠 진영씨를 기다려준다. 진영씨도 종종 시댁에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선 감독은 “남편이 어쭙잖게 중재하는 건 큰 도움이 안된다”며 “부모님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 체념했지만, 아내를 통해 그게 다가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아내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진영씨는 “가장 중요한 건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서로를 타인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각자의 방식대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상대도 바뀐다는 걸 제 또래의 며느리들이 알아주면 좋겠어요. 결혼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타협하고 삶의 주기를 맞추는 과정이잖아요. 힘들기도 하지만 행복할 때가 더 많죠. 결혼이 나쁜 것만은 아니랍니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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