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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양문이 명·청대의 영화 자랑|청강 김영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우리가 묵고 있는 북경 사범 대학 캠퍼스 안의 외국인 전용 식당에는 매일 1백여명의 외국인 교수·학생들이 출입하면서 식사를 했다. 백색의 2층 건물 안 1층은 각종 사무실과 도서관으로 쓰고, 2층의 큰 홀이 식당인데 조석으로 식사시간이 되면 매우 복잡했다.
가을의 신학기가 되니 각국에서 많은 유학생들이 새로 왔다. 이들의 국적은 일본·미국·프랑스·독일·영국·캐나다 등의 순서로 그 수가 많았다.
한국인은 우리 일행 4명의 임시객 뿐이었다. 넓은 식당 안에는 장방형의 많은 식탁과 의자가 있고, 또 한편에는 「수판추」라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어 여기서 밥과 반찬, 그리고 각종 음료수를 직접 날라다 먹으면서 담소하곤 했다. 식사시간은 엄격해 그 시간을 놓치면 식사를 못하므로 서로 다투어 자리 잡기에 바빴다. 식탁은 보통 6인용인데 신학기가 되니 우리 4명이 앉으면 남는 자리에는 종종 외국인 학생이 2∼3명씩 와서 합석할 때가 있었다.
이들 외국인 남녀 학생들이 와서 합석할 때는 때로 먼저 말을 걸어 그들의 중국 (한)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또 어떠한 방법으로 공부하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대화했다.
나는 서울의 성대 중어 중문과에 15년간 재직 중 특히 중국의 언어학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냈으므로 이들 외국인 학생들과 중국어 (또는 영어)로 대화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대개 22∼23세 정도의 순진한 학생들이라 대화하기에 편했다.
특히 일본인 학생들은 구미 계통의 학생들보다 비교적 중국어를 곧잘 했는데 더욱이 어려운 중국어 발음을 제법 해내는 것을 보고 의외로 생각했다. 이들 일본인 학생들은 일본 각지 (예를 들면 북해도·동북 지방·관동 지방 등) 출신인데, 일본 국내의 외국어 대학 중국어과에서 3년간 수학하고 외국 유학 자격 고시에 합격하면 일-중 우호 문화 협회 알선으로 중국 유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본국에서 3년간 중국어를 수학한 것이 기본적 어학의 실력을 갖추게된 까닭이라 했다 (본국 대학에서의 3년간 외국어 수학 방식은 다른 구미 계통 학생들의 경우도 같았다). 몇몇 일본인 유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매년 약 1백50명의 학생들이 중국의 북경·천진·장춘·상해·남경·항주 등지의 대도시 대학으로 유학, 1년 동안 (혹은 희망에 따라 2년간) 중국 (한)어를 공부하고 대학 과정을 마치는데 현지에서의 체험에 의한 성과가 매우 크다고 했다.
다음으로 북경 사대 안 외국인 유학생들의 수강 방식에 대해 알아보니 수강생은 A, B 2반으로 나뉘는데 A반에서는 교수가 중국 (한)어로만 강의하고 B반의 교수는 영어로 보충 설명을 하면서 강의한다. 자연히 동양계 (일본) 학생들은 A반에서, 서양계 학생들은 B반에서 많이 수강한다고 했다.
이들이 나에 대한 관심의 하나로 어째서 중국어학에 대해 관심이 많으냐고 묻기에, 그들처럼 원래 이곳 (북경) 학생으로서 귀국 후에는 서울 모 대학에서 중국 (한)어 강의를 15년간이나 했다고 했더니 이들은 나에게 더욱 친근감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대화에 응했다.
외국인 학생들에게 중국 음식이 입에 맞느냐고 물으니 수강 방식과는 반대로 일본계 학생들은 서구 학생들보다 중국 음식을 잘 못 먹었다.
도서관에서 각기 자기 나라의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밤늦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의 모습을 침실 창을 통해 보고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대만에 유학해 공부하고 있지만…) 부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10월 초순 어느 날, 나는 과거 50여년 전 북경 유학 시절 자주 놀러 다니던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차를 전세 내 먼저 북경성 제1의 관문인「쩡양먼」(정양문)과 외성 제1의 번화가였던 「따차란」(대책난)을 찾았다.
정양문 (이 현판은 명의 대가 동기창 필)은 내·외성 중간에 있는 최대의 누문 (서울의 남대문 같은)으로 일명 「첸먼」 (전문)이라 불린다. 이 누문은 1421년 (명영악 19년)에 세운 성곽의 누문으로 높이가 42m, 면이 7m으로 그 웅장한 모양은 지나는 나그네의 마음을 압도한다.
이 3중의 누각식 건물은 회갈색의 기와지붕과 주황색의 중담(층단 식 추녀)으로 북경시내 외성의 12대 누문이 없어진 오늘날 가장 귀한 대표적 누문이다. 북경을 상징하는 이 대 누문의 위관은 배경을 찾는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다음 정양문 밖 외성 제1의 번화한 상가인「따차란」을 찾았으나 지금도 내 눈에 선한 그 화려했던 각종「파이먼」(패문)과 번창했던 상점들의 모양들, 그리고 귀에 쟁쟁하던 그「댕그랑 댕그랑」하며 거리 이곳 저곳에서 흘러나오는 중국고유의 악기와 노랫소리는 보고들을 수가 없었다.
「첸먼따제」(전문대가)의 한국교포가 경영하는「까오리 찬팅」(고려찬청·한국식당)에서 오랜만에 한중 절충식 냉면으로 점심을 들고 내성의 유명한「베이 하이 꿍웬」(북해공원)으로 갔다. 이 북해공원은 역대 왕실의 어원으로 10세기초「랴오다이」(요대) 에 창시해 만든 아름다운 위락장소다. 백색의 대리석교를 건너 만세산 봉우리에 우뚝 솟아있는「라마탑」(1651년 건조)의 교태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 공원의 상징물이다. 대리석교를 올라서면 멀리 아롱진 단청의 유리벽「쥬룽비」(구룡벽)와「우룽팅」(오룡정)의 전아한 모습이 호 면에 반사되어 더욱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북해공원을 나와 중남해공원을 지나고 또「즈건청」(자금성)북쪽의「징산」(경산)과「스차하이」(십찰해)공원 등을 보면서 달렸다. 경산은 3봉의 이른바 3형제 산인데, 이 3봉마다 정자가 있어서 나는 학창시절 이곳에 자주 올라가 멀리 동남방의 고향을 그리며 당 왕유의 유명한 시『사 고향』의「…매봉가절배사친…」 (…객지에서 명절을 당할 때마다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더욱 간절해…)을 읽던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다음은 내가 살던 북경시 북방의 한 번화가, 비단 상점이 즐비하던「베이신 촐」(배신교)과「꾸루둥 따제」(고누동대가)를 찾았다.「베이신 촐」은 그저 쓸쓸했고「꾸루둥 따제」의 고누(1420년·명 영악 18년 건립)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어서 50여 년 전 학창시절 물덤벙 술덤벙 하면서 즐겁게 놀던 당시를 잠시 회상케 했다.
석양이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는 때 천천히 차를 몰아숙소로 향하는 차 중에서『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인정 또한 사라지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고색이 창연한「더컹먼」(덕승문) 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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