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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필의 미친 도전 … 20시간짜리 바그너 ‘반지’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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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8일 홍콩문화센터의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그너 ‘신들의 황혼’ 공연.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일 홍콩문화센터의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그너 ‘신들의 황혼’ 공연.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일(현지시간) 오후 6시 시작한 공연은 자정에 끝났다. 홍콩 젠사쥐(尖沙咀)에 있는 홍콩 문화센터 콘서트홀. 휴식 두 번을 포함해 6시간 동안 이어진 공연은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마지막인 ‘신들의 황혼’이었다. 바그너가 26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이날 무대에는 110명의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지휘자 얍 판 즈베덴, 13명의 독창 성악가와 80명의 합창단이 올랐다.

4부작 오페라 4년 연주 마무리 #‘아시아 문화 중심지 되겠다’ 의욕 #미국 성악가, 독일 합창단 불러와

인구 700만여 명의 홍콩에서 홍콩필은 2015년부터 4개 오페라를 완주했다. 음반사 낙소스에서 모든 실황을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했다. 오페라 4부작의 총 공연 시간은 20시간. 이날 공연은 그 여정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신들의 황혼’은 어느 오케스트라에게나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신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에 웅장한 소리를 입히길 원한 바그너는 호른 8대, 하프 6대, 트롬본 4대, 트럼펫 4대 등을 포함하는 편성을 썼다. 라인강의 황금 반지를 놓고 시작된 저주가 한 여인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마지막 편인 ‘신들의 황혼’이다. 이날 홍콩 콘서트홀의 청중은 바그너의 장대한 세계를 경험했다.

홍콩필이 ‘니벨룽의 반지’ 전막을 연주한 것은 1957년 창단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현악 주자들은 바그너가 정교하게 디자인한 소리의 굴곡을 기민하게 따라잡았다. 인간 영웅의 등장을 알리는 호른의 소리는 단단하게 청중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비록 무대 장치와 연출이 없는 콘서트 오페라 형식이었지만 바그너 특유의 장엄한 선율이 세계적 수준으로 재현됐다.

홍콩과 바그너라는 조합의 성공 뒤에는 지휘자 얍 판 즈베덴(58)이 있다. 네덜란드 태생으로 2012년 홍콩필을 맡은 이래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해왔다. 홍콩필은 하이든·모차르트 같은 고전시대로 기본기를 쌓고 말러 등에서 사운드의 한계를 넓혔다. 해마다 150회 넘게 연주 일정을 잡고, 해외 투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4년에 걸친 ‘니벨룽의 반지’ 전곡 연주·녹음은 그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홍콩필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한 성과를 인정받은 즈베덴은 미국 뉴욕 필하모닉의 새로운 음악감독으로 낙점됐다. 올해 임기를 시작한다.

2012년 홍콩필을 맡아 바그너 ‘반지’시리즈를 완성한 지휘자 얍 판 즈베덴.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2년 홍콩필을 맡아 바그너 ‘반지’시리즈를 완성한 지휘자 얍 판 즈베덴.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7일 홍콩에서 만난 즈베덴은 “6년 전 홍콩필에 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것이 ‘무엇이 빠졌나’였다. 아무도 생각조차 안 해본 시도가 필요했다”고 했다. 그는 ‘니벨룽의 반지’를 떠올렸고 이를 위해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즈베덴은 “단원뿐 아니라 홍콩 청중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즈베덴은 복잡하고 거대한 바그너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끝없이 연습시켰다. 이번 ‘신들의 황혼’을 위해 1년 전부터 연습을 시작했고, 공연 7주 전 전곡을 실연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했다. 즈베덴은 “그 결과 홍콩필이 바그너의 어두운 소리 내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했다.

성악가들은 즈베덴을 두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휘자”라고 했다. ‘신들의 황혼’에서 구트루네 역을 맡은 소프라노 아만다 마제스키(미국)는 “내가 16분 음표를 조금 먼저 불렀다는 이유로 연습을 중단시켰을 정도”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작은 디테일 때문에 연습을 멈췄다. 그는 악보의 모든 것을 외우고 있다”고 했다. 지그프리트 역의 테너 대니얼 브레나(미국)는 “즈베덴은 오랫동안 세계적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장을 했다. 때문에 오케스트라 음악에 대해 기술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즈베덴은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에서 18세부터 악장으로 연주하다 37세에 지휘자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런 대작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지휘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홍콩필 대표인 마이클 맥러드는 “바그너 프로젝트를 홍콩 사회에 이해시키는 데 노력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홍콩필은 바그너의 도시인 독일 바이로이트에 사람을 보내 오케스트라 현악 단원들의 보잉(bowing)과 같은 연주 기법을 악보에 베껴오도록 했다. 성악가는 대부분 바그너 경험이 많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캐스팅했고 합창단은 독일·라트비아에서 불렀다. 금관악기 연주자 15명도 유럽에서 초청했다.

정부가 예산을 지원한 배경은 홍콩이 아시아의 문화 중심지가 돼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맥러드는 “홍콩 사람들이 바그너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사회가 음악을 듣는 기준 자체가 올라간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홍콩필은 단지 연주와 녹음만 한 것이 아니라 ‘니벨룽의 반지’를 어린이용으로 쉽게 풀고, 전시회를 열고 공연 전 강의를 팟캐스트에 올리는 등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홍콩필의 야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맥러드는 “2020년 이후 홍콩에 새로운 콘서트홀이 생긴다. 여기에서 ‘니벨룽의 반지’ 전체를 나흘 연속 공연하며 전 세계 청중을 불러 모으는 것이 우리의 더 큰 꿈”이라고 했다. 맥러드는 “미친 아이디어가 가장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고 즈베덴은 “가장 위험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홍콩필은 ‘신들의 황혼’ 공연을 21일 오후 3시에 다시 한번 6시간 동안 무대에 올렸으며, 이날 열린 공연은 2000석 전석 매진됐다.

홍콩=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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