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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근수 달 듯 양만 평가 저자 끼워넣기 관행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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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내 대학.연구소 중 논문을 가장 많이 낸 서울대는 2004년 3199편을 실어 세계 대학 중 32위다. 세계 대학 100위권에도 들지 못했던 90년대 중반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국내 학술지의 성장도 눈부시다. 학술진흥재단에 등재된 학술지는 2005년 현재 1312종. 6년 새 5배로 늘어난 수치다. 이들 학술지에 실린 국내외 논문은 6만3597편에 이른다. 석.박사 학위논문도 증가 추세다. 지난해 각 대학에서 국회도서관으로 보낸 학위논문은 6만3447편. 2000년(5만3200편)에 비해 19.3% 늘었다.

하지만 '한국 논문이 질적으로 성장했는가'하는 점엔 이견이 많다. 일반적으로 논문의 우수성은 해당 논문이 동료 연구자의 논문에 얼마나 인용됐는지를 세는 '피인용지수'로 따진다. 해외 학술지에 실린 국내 논문의 피인용지수는 2004년 기준으로 세계 33위에 머물고 있다. 논문 수는 한국보다 적어도 피인용지수는 세계 1위인 스위스와 대조적이다.

국내 학술지의 경우 아직 피인용지수를 파악할 수 없다. 최근 학술진흥재단이 이를 찾아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시험적으로 만들었지만 실제 이용은 내년 하반기부터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실적 압박이 부정행위 부추겨"=논문의 양적 팽창 배경엔 교수 업적평가제가 있다. 90년대 말부터 각 대학이 도입한 업적평가제는 연구실적과 교육, 대외활동을 따져 임용과 승진, 연구비와 연봉까지 결정한다. 이 중 논문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평가제는 '철밥통'으로 불리던 교수.대학사회를 실적을 중시하는 경쟁 세계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평가제도가 논문 수 위주로 업적을 따지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질 낮은 논문을 양산하고 비윤리적 행위를 부추기는 원인이 된다는 게 교수들의 항변이다.

"최근 들어 단 한 편이면 충분할 논문을 두세 편으로 나눠 투고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자신들은 '후속 연구'라고 주장하지만 업적 불리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한 인문계 학술지 편집위원)

같은 논문을 여러 학술지에 투고하는 '이중 투고' 등 부정행위도 잦아졌다. 학회에서 7년여간 논문 심사를 담당해온 이모 교수는 "실적에 내몰린 연구자들이 같은 논문을 제목만 바꿔 외국 학술지와 국내 학술지에 동시 투고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논문 편수라는 한 가지 잣대로 보다 보니 학문 분야별 특성을 무시한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장인 임현진 교수는 "역사 관련 연구는 자료수집에만 1년 이상 걸리는데 해마다 반복되는 평가 때문에 깊이 있는 연구에 몰두하기 어렵다"며 "저울로 고기 근수를 달듯, 논문 수만 중시하는 풍조는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외대 정일영(정보처리) 교수는 "공학에선 아이디어 중심의 논문뿐 아니라 실용화.상용화 기술도 중요하다"며 "실적에 매달려 논문만 쓰고 말아 아이디어가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부산대 이은섭(무역학) 교수는 "업적에 따른 처우 차이가 클수록 동료평가가 더 엄격해져 학회나 학교 내 자정능력이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 허귀식.천인성.박수련 탐사기획부문 기자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변선구 사진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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