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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전범 재판 물거품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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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 세르비아 시민이 12일 유고 전범들의 얼굴을 넣어 만든 달력을 만지고 있다. 왼쪽이 11일 사망한 밀로셰비치이고 가운데가 라도반카라지치, 오른쪽이 라트코 믈라디치다. 두 사람의 소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반자루카 로이터=연합뉴스]

'발칸반도의 학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11일 옥사했다. 64세. 독일 dpa통신은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의 유엔 감방 침대에서 숨져 있는 것을 교도관이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측은 "밀로셰비치가 자연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현지 의료진은 "사인이 심부전증일 것"으로 추정했다. ICTY 측은 독일 법의학연구소(NFI)의 주관하에 12일 시신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로 했다.

◆ 사망 전날까지도 당당=밀로셰비치의 측근인 세르비아 사회당의 밀로라드 부첼리치는 11일 밀로셰비치가 사망 직전까지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부첼리치는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고 있던 밀로셰비치가 지난달 러시아에서 치료받게 해달라는 요청을 재판부가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그의 사형선고에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또 밀로셰비치의 유족은 "그가 독살됐을지 모른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밀로셰비치가 사망 전날 자신의 독살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썼다고 그의 변호사인 젠코 토마노비치가 12일 주장했다. 토마노비치는 이날 헤이그 ICTY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밀로셰비치의 6쪽짜리 자필 편지 사본을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 향후 재판 어떻게 되나=2002년부터 4년을 끌어온 밀로셰비치의 재판은 미완성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재판부는 당혹스러운 입장이다. 전범의 주역인 밀로셰비치에게 선고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ICTY의 칼라 델 폰테 수석검사는 12일 밀로셰비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희생자들에게서 정의를 빼앗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밀로셰비치 사후 하루 뒤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밀로셰비치) 재판이 종료되지 않고 평결이 내려지지 않은 것은 정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유엔의 발칸담당 특별대사를 맡았던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도 "밀로셰비치의 죽음은 헤이그 법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보스니아 내전의 또 다른 전범 주역인 라트코 믈라디치와 라도반 카라지치는 아직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현재 법정에는 발칸의 전쟁범죄와 관련해 44명의 피고인을 대상으로 8개의 또 다른 재판이 진행 중이다. 그동안 133명을 법정에 세워 40명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고 8명을 무죄로 풀어줬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발칸 분쟁 일으켜 수십만 명 학살

◆ 밀로셰비치 누구인가=1990년대 발칸 분쟁을 일으킨 악명높은 독재자다.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에 견줄 만한 '인종청소'로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내걸고 크로아티아(91~95년), 보스니아(92~95년), 코소보(98~99년) 등에서 잇따라 전쟁을 일으켜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26만5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300만 명이 난민으로 떠돌았다. 지역경제는 쑥대밭이 됐다.

그는 41년 8월 20일 세르비아 동부 포자레바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 정교 성직자였고 어머니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교사였다. 부모가 모두 자살한 그의 가정환경은 불우했다. 64년 베오그라드대 법대를 졸업한 뒤 국영기업인 테크노가스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정계에 진출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특히 그는 대중을 선동하는 탁월한 언변으로 단기간에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97년 유고연방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를 부추겨 발칸 전 지역을 다스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의 재임기간 중 발칸반도는 끊임없는 유혈사태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는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와 99년 3월 단행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고 공습으로 궁지에 몰려 결국 2000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13년간 휘둘러온 그의 철권통치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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