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암호화폐 대혼란, 누가 책임질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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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11일 기자 간담회에서 암호화폐(가상화폐) 거래소를 없애는 법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는 관련 부처와의 협의를 끝냈으며, 이미 법안이 마련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오쯤 그의 발언 내용이 알려지자 국내시장에서 암호화폐 가격은 곤두박질쳤다. 약 두 시간 사이에 대부분의 암호화폐 거래가가 20∼30% 폭락했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암호화폐 거래소 관련 회사들의 주가가 가격제한폭(-30%)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곧바로 거래소 폐쇄에 반대하는 글로 뒤덮였다. ‘여기가 공산주의 국가냐’는 제목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한국 정부가 중국처럼 암호화폐 거래를 불법화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법무장관 “거래소 폐쇄” 발언에 시장 요동 #청와대 “확정된 사안 아니다”며 수습 나서 #돌출인지 협의된 것인지 혼란 책임 밝혀야

그러자 대여섯 시간 뒤 청와대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암호화폐 거래소 폐지와 관련한 박상기 장관의 발언은 법무부가 준비해 온 방안 중 하나이며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 각 부처의 논의와 조율 과정을 거쳐 최종 결정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바로 직전에는 기획재정부가 확대간부회의를 열었다. 그 뒤 시장은 다시 요동쳤다. 거래가가 반등해 박 장관 발언 이전 수준과 비슷해졌다. 롤러코스터 같은 장세 속에서 누군가는 크게 손해를 봤고, 다른 누군가는 큰 이득을 챙겼다. 박 장관의 말을 믿은 이는 팔기 바빴을 것이고, 청와대 청원의 힘을 믿은 이는 싼값에 사들였을 것이다.

청와대 발표 내용이 사실이라면 박 장관은 검토 단계의 정책을 성급하게 발설해 혼란을 야기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암호화폐 문제 대응은 국무조정실이 총괄해 왔다. 이날은 특이하게도 법무부 장관이 ‘단독 플레이’를 했다. 정부의 중요 방침을 공식 브리핑이 아닌 기자 간담회에서 공개한 것도 경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런데 시중에는 청와대가 법무부의 거래소 폐쇄 방안에 동의하고서도 비판 여론을 의식해 황급히 수습에 나선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만약 이것이 진상이라면 이 또한 누군가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박 장관은 “가상화폐 거래가 사실상 투기·도박과 비슷한 양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의 지적처럼 국내 암호화폐 시장은 다른 나라에 비해 과열돼 있고, ‘돈 놓고 돈 먹기’식의 투기판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래소 폐쇄라는 극단적 조치까지 동의하기는 어렵다. 최근 정부는 거래 투명화(실명화 포함), 차익에 대한 세금 부과 등으로 암호화폐 시장 과열 사태를 진정시키겠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러다 느닷없이 주무 장관 중 한 명이 원천적 거래 금지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금연을 유도하는 정책을 펼치겠다고 하고선 갑자기 담배 유통을 불법화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암호화폐 시장 문제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설프게 칼을 휘두르면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시간이 걸려도 정교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