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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표현에 참신한 생각 담자

중앙일보

입력

잔뜩 풀죽은 표정의 제이가 찾아왔다.

권부장 : 잘 있었니, 제이야?
제이 : 숙제로 제출했던 논술문 첨삭지도를 받고 오는 길입니다. 온통 빨간 수정펜 첨삭이 가득한데, 좋은 말은 하나도 없어요. 나름대로 글 잘 쓴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고, 책 읽기에도 공들이는데 논제만 받아들면 스트레스가 쌓여요. 정말이지, 전 논술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
권부장 : 논리적 사고 방법을 깨닫기 전에 글쓰기 요령에만 익숙해진 건 아닐까? 무엇이든 기초부터 다지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단다. 어디, 첨삭문을 좀 보자.

'생각난 대로 적어낸 것은 논술이 아니라 낙서입니다. 논술문의 요건이 적시되도록 글을 풀어가시기 바랍니다.'

중앙샘 : 첨삭지도가 좀 거칠게 표현되긴 했구나, 제이가 주눅 들만도 하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슷한 실수를 한단다.
권부장 : 논리적 사고를 풀어내는 논술은 그 글을 읽는 상대방, 예를 들면 출제위원을 설득하기 위한 글이라는 걸 늘 기억하렴.
중앙샘 : 많이 볼 것도 없이 첫 문단부터 문제가 있구나. 논제가 뭐였지?
제이 : '과학자가 우선적으로 가치를 두어야 하는 과학과 사회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논하시오'였어요.
중앙샘 : 네가 쓴 논술문 중에 이 부분을 나누어서 보자꾸나.

① <500년 전과 지금 인류가 가진 보편적 상식이 서로 다른 이유는 과학의 발전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주가 4개의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0년 전의 지배적인 패러다임과 대항하며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과학은 자연에 대해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② <그리고 그 지식을 통해 더 효과적인 기술의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발전은 인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영역에서도 발생됐다. 무기류의 발전, 생명윤리에 저촉되는 인간복제의 위험 등이 예이다.>

중앙샘 : ①만을 보면 고등학생이 아니라 전문가가 쓴 글인 것 같아. 하지만 좋은 논술문이란 어려운 단어를 쓰고,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 방식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란다. 제이의 글은 다소 '현학적'이고 어느 정도 글쓰기 훈련이 된 사람의 '오만함'마저 느껴지는구나.
권부장 : 논술을 쓸 땐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집중해야지, 그 메시지를 '꾸미는데' 집중하면 안된단다.
중앙샘 :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 논술문을 첨삭하는 선생님도 제이 못지않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야. ②에는 논제와 상관없는 '기술'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대개 학생들은 '과학'과 '기술'을 혼동하는데 그것은 별개의 개념이야. '자유'와 '권리'만큼이나 그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어.
권부장 : 가장 큰 문제는 제이 자신이 아는 지식을 화려하게 나열하려는 욕심에 있는 게 아닐까? 아직도 제이의 논술은 '논제'와 상당한 거리가 있단다.
제이 : 그러니까 '지식'보다는 솔직담백한 저의 '논리적 생각'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중앙샘 : 옳지! 이제야 좀 이해하는구나. 고등학생의 글은 고등학생다워야 하고, 고등학생만의 참신한 생각이 드러난 논술일수록 채점위원들을 감동시킨단다. 논술 역시 하나의 글이고 감정과 인격이 들어가 있지. 채점위원들은 논술을 쓴 학생의 '논리'뿐만 아니라 '인성'도 중요한 항목으로 생각한단다.
제이 : 잘 알겠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너무 '어른스러운 글'을 쓰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 제이의 일기

"고등학생은 고등학생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는 말은 내게 참 필요한 말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지식을 친구들 앞에서 뽐내거나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었던 것 같다. 권부장님과 중앙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나서 내 글을 다시 보니, 나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만 가득했다. 첨삭 선생님의 지적을 원망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논술도 '나의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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