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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로로 연결된「동양의 베니스」소주-청강 김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나는 남중국의 삼주, 즉 항주·소주·양주 등지를 여행하면서「몽상삼주오십재」(50년간 꿈에만 보던 세 고을) 란 글귀를 지어 혼자서 읊었다.
9월13일 중국 제2의 예향소주를 방문했다. 항주를 떠날 때 내린 보슬비도 소주에 도착하니 그쳐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우리 일행 중 처제 부부가 며칠 후 여행할 남경행 차표를 미리 사러간 사이 나는 바로 옆 난간에 앉아있던 두 젊은 여자들에게 말을 거니 이미 먼저부터 유심히 우리를 쳐다보던 소 주 촌녀들은 자못 흥미 있어 했다.
『어디서 오신 외국인인데 이렇게 우리 나라 서울말을 잘 하십니까.』
『우리는 대한 민국, 즉 남조선에서 온 미술가인데 소주관광을 하는 중이요.』
『당신들의 나라는 생활수준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사실이지. 그런데 자네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그들이 이점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할 순 소주지방 사투리로 대담하며 둘이서 깔깔대고 웃었다. 내가 그들의 소주 사투리를 흉내내니 이들은 더욱 큰소리로 웃어댔다.
나도 그들과 같이 한참 웃어대니 배꼽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다른 외국인들처럼 차를 불러 타고 시내의 숙소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명승지 소주의 시가와 도로들, 특히 수로와 수로로 연결되는 동리 집들의 풍정은 소주가「동양의 베니스」라고 일컬을 만 하다고 생각됐다.
배에 채소·과실, 기타 각종화초를 싣고 배를 저어 이마을 저마을 찾아다녀는 수로의 소주소녀들 모습은 이국정서를 더해주는 풍정이었다.
도로는 중국안의 다른 도시와 같이 자전거 행렬로 줄을 이었다.
점심을 먹고 혼자서 호텔부근의 큰 가로로 나섰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소주 고구서점·소주공예상점.
쇼윈도에는 이 고장 명가들의 작품과 각종 전아한 공예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소주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길거리에서 이 같은 대소의 화상·공예상 들을 보면서 과연 소주야말로 항주와 더불어 관광도시인 동시에 예술의 고향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일찌기 청년 시절에 서신의 내왕으로 사귄 이 고장의 명가 오대추와 조자운 두 작가의 소식을 알고싶어 조바심 났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바로 혼자 우리숙소 악향반점(러샨판렌)호텔 정문 앞에 즐비한 미술상점을 돌아봤다.
외국인인 나를 본 이들 미술상인들은 서로 자기 상점의 의자를 내다놓고 앉으라고 권했다. 이들의 목적은 물건을 파는 것보다는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말 저말을 끄집어내 일본어로 어떻게 말하느냐고 물었다.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 나이든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중국의 토화(사투리)연구에 있어서 우리 나라 말 중「만두」라는 뜻은 북경어의 「만토우」(만두·주먹떡)와 다르나 우리 나라의「만두」는 고대의 오어(이 소주지방 말) 가 그대로 전래된 것이라는 말을 재확인하고 기쁨을 금치 못했다.
달 밝은 밤에 소주의 제1야는 깊어가건만, 나는 내가 이미 50년 전부터 친교를 맺어온 명가 오대추와 조자운의 소식을 알지 못해 잠을 못 이뤘다.
다음날은 소주의 제2일, 유명한 소주의 정원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일찍 호텔을 떠나 먼저 유명한 한산사로 향했다. 거리는 출근시간이라 청년 남녀들의 자전거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거…망…」 (급…망…) 한 시간이다.
새로 건축되는 백색의 빌딩과 새로 포장하는 새 시가를 지나 우리는 드디어 유명한 한산사 정문 앞에 이르렀다. 황색의 긴 담이 끝나는 곳에 흑색의 정문이 있고, 바로 정문 앞 하천에는 당의 시인 장계가 읊은 시중에 나오는 석조의 풍교가 보였다.
『월낙조제상만천 강풍어화대수면 고소성외한산사 야반종성도객선』(서리가 내려 찬데 달이 지고 새들이 우지지니, 고깃배에 켜 논 불 시름 속에 조으네, 풍교는 여긴데 고소성 밖 한산절의 밤 종소리 졸고 있는 객선에도 오네!) 어느새 나는 스케치북을 퍼놓고 손을 움직였다.
한산사를 보고 난 우리는 서원고찰 유원을 지나 멀리 북사고탑이 보이는 호구(후츄)를 거쳐 졸정원·사자림에 들어섰다. 이 사자림이란 그 이름과 같이 정원 도처에 사자형태의 많은 괴석들이 웅크리고 있어 지나는 관광객들의 경탄과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니 다시 소주명가 오대추·조자운의 자손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소주기행 사흘째 날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제일 먼저 소주박물관으로 직행했다. 홍주 흑난의 복도를 지나고 또 지나니 이곳 저곳 정원에는 남국풍취가 감도는 종려나무와 소철, 그리고 각종의 아름다운 초화가 우리를 맞았다.
박물관을 돌아보고 사무실을 찾아 한 직원 (부관장 왕씨)에게 혹 소주명가 오대추와 조자운 화백의 소식을 알 수 있느냐 물었더니 그는 좀 있다가한 30대의 청년을 데리고 와 이가 바로 오대추의 손자로 현재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오 화백의 소식을 안 것은 기쁘나 나는 또 조 화백의 소식을 알고싶어 점심을 먹은 후 전에 그가 살던 봉문구 대성교호동 49호를 뒤졌지만 끝내 집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박물관에서 인사한 오대추의 손자와 그 부친(오 화백의 아둘)을 우리 호텔 식당으로 초청했다. 그 부친 오집목(형)은 나를 보고 매우 반가와 하면서 이미 자기가 어릴 때 아버지(오 화백)로 부터 내 소식을 들어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문화혁명 때 부친이 지식분자로 취급당해 많은 박해를 당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은 개방정치로 이렇게 먼 외국의 반가운 손님을 만났으니 자기 부친이 생존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안타까와 했 다. 호텔에서 함께 식사를 마치자 그는 잠시 자기 집에 가보자고 권했다.
나와 동서 조씨는 그를 따라 호텔에서 과히 멀지 않은 호룡가(지금은 인민가)호동 정호로 안내됐다.
오씨 부자를 따라가는 이국의 두 사람, 비록 중국어는 다 통하더라도 너무나 컴컴하고 후미진 좁은 골목을 요리 돌고 저리 꼬부라져 오직 손전등을 따라(가로등이 없어서) 한참만에 그의 집으로 들어섰다. 오씨 부자는 바로 내가 서신으로 교우하던 그 부친 (오대추)이 쓰던 화탁을 보여주었다. 나는 반가와서 그 자리에 앉아봤다.
잠시 후 그 부인과 며느리가 각종의 다과를 들고 나왔다. 그는 마침 중추절이 임박해 이 월병을 대접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근대 명가 오백도의 아들로 태어난 오 화백 일문은 대대의 명문 예술가 집안이다. 2층으로 된 작은 궁성 같은 순 중국식 건물인 그의 집은 잠시 나로 하여금 별세계에 온 것 같은 인상을 갖게 했다.
우리가 내일 남경으로 떠난다하니 아들 오방목씨는 일부러 남경의 두 친구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오씨 부자는 다시 손전등을 들고 큰길의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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