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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당시 美, 핵 보복 땐 소련·중국 동시 타격 계획”

중앙일보

입력

핵폭발 장면

핵폭발 장면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 당시 미국 핵 플랜은 전면전만을 가정했다. 만약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을 발사하면, 미국은 소련은 물론 소련의 동맹인 중국 또한 동시 타격할 계획이었다.”

70년대 '펜타곤 페이퍼' 폭로 주역 대니얼 엘즈버그 #새 회고록서 미-소련 간 첨예했던 핵 전략 공개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전면전도 가능" 핵위험 경고 #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쟁 개입 과정에 관한 비밀문서,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했던 대니얼 엘즈버그(86)가 또 하나의 묵직한 기밀을 털어놓았다. 존 F.케네디 행정부 시절 미국이 소련의 위협에 맞서 구체적인 핵전쟁 전략을 마련했고 이 시스템이 실제 가동됐다면 전면적 파국을 피할 수 없었으리란 사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북한 김정은 정권 간의 고조되는 군사 대결이 한 끗 실수로 인해 묵시록적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다.

16일(현지시간)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엘즈버그는 최근 출간한 신간 『심판의 기계: 핵전쟁 기획자의 고백』(The Doomsday Machine: Confessions of a Nuclear War Planner)에서 펜타곤 페이퍼 폭로 때 밝히지 못했던 또 다른 기밀 문서와 관련한 회고담을 털어놨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왼쪽)의 핵무기 개발 위협에 맞춰 전면 핵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선 대니얼 엘즈버그. 그는 197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전막을 담은 '펜타곤 페이퍼'를 언론에 유출한 내부 폭로자다. [사진 뉴욕포스트]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왼쪽)의 핵무기 개발 위협에 맞춰 전면 핵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선 대니얼 엘즈버그. 그는 197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전막을 담은 '펜타곤 페이퍼'를 언론에 유출한 내부 폭로자다. [사진 뉴욕포스트]

알려진대로 당시 엘즈버그는 미 국방부 산하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The Rand Corporation)에서 베트남전에 관한 기밀문서를 토대로 일급 기밀 연구를 수행 중이었다. 그는 이때 펜타곤 페이퍼 외에 미국의 핵전쟁 전략과 관련된 기밀 문서도 수천 페이지 복사했다. 엘즈버그는 “당장 폭격이 진행 중인 베트남전쟁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해서” 핵 문서 공개를 차후로 미뤘다. 하지만 가족을 통해 은밀히 보관했던 핵 문서가 자연 재해로 소실돼 버려 실물로 이를 공개하진 못하게 됐다.

엘즈버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확인한 미국 핵 전략의 가장 위대하고 심각한 단점은 ‘실수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핵폭탄은 “잘못된 경보나 테러리스트의 침입, 허가받지 않은 발사 결정에 취약한” 체계를 갖췄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보좌관 등과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있다.[존 F 케네디 기념도서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보좌관 등과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있다.[존 F 케네디 기념도서관]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만이 핵 버튼을 누를 수 있을 거라는 일반인의 생각도 사실과 다르다고 그는 증언했다. 미국이 공격에 처하거나 대통령이 제 시각에 반응 못할 경우 더 낮은 지휘관도 이런 권한을 갖게 설계돼 있다. “보복 타격을 명령할 권위와 능력은 백악관 바깥 관료들 뿐 아니라 워싱턴 바깥 인물들에게도 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적(소련)의 핵 시스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엘즈버그는 실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 해군의 공격 위험을 확대 해석한 소련 측 지휘관이 핵 어뢰를 미군 함정에 쏠 뻔했다고 증언했다. 비록 소련 정부의 발사 명령은 없었지만 실전에선 발사 준비에 들어갔었단 것이다. 게다가 모스크바 역시 임박한 공격을 감지한다면 자동적으로 핵 반격을 하도록 시스템이 돼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촉즉발 상황에서 미·소 정상이 군사 대치 철회에 합의함으로써 인류의 파국을 피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와 함께 엘즈버그는 만약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선제타격을 받는다면 중국에 대해서도 동시에 핵 반격한다는 계획이 있었다고 공개했다. 이와 관련 1960년대 기밀 회의에선 “일으키지도 않은 전쟁에 대해 수억명의 중국인을 죽이는 건 부도덕하다”는 반론이 나왔지만 계획이 그대로 유지됐다고 한다. 전쟁 상황에서 공산국가 소련과 중국이 손잡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했던 대니얼 엘즈버그가 최근 출간한 신간 『심판의 기계: 핵전쟁 기획자의 고백』(The Doomsday Machine: Confessions of a Nuclear War Planner) 표지.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했던 대니얼 엘즈버그가 최근 출간한 신간 『심판의 기계: 핵전쟁 기획자의 고백』(The Doomsday Machine: Confessions of a Nuclear War Planner) 표지.

엘즈버그는 “나는 이 계획을 변화시키려는 열망 뿐이었다”면서 이후 미국의 핵 계획이 변화하는 데 자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썼다. 그가 ‘제한된 핵전쟁’이라고 부른 새로운 계획 하에선 설사 핵 폭격기가 뜬 뒤에도 백악관이 공격 명령을 거두길 원할 때 이를 되돌릴 수 있는 방안 등이 보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즈버그는 “개선된 계획도 핵무기의 우연한 사용을 방어하기엔 충분치 않다”고 고백했다. 대통령이 실수로라도 수분 안에 수백기에 이르는 핵을 발사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핵 폭격기와 달리 한번 날아간 핵 미사일은 되돌릴 방법이 없다.

엘즈버그는 “우리 도시가 단 한방의 무기에 의해 전멸될 위험성은 제로(0)로 감소되지 않겠지만 인간 전체를 종말로 이끄는 위험은 제로로 줄여질 수 있다”면서 그 유일한 해법이 핵무장 해제라고 촉구했다. 비록 그의 호소는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미국과 러시아를 향했지만 핵보유국 지위를 자처하는 북한 역시 귀기울여야 할 메시지다.

◆다니엘 엘즈버그=하버드대 출신의 국방 전문가로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과정에 관한 국방부의 비밀문서를 언론에 유출했다. 1971년 6월 ‘뉴욕 타임스’와 뒤이은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로 세상에 공개된 이 문서들은 ‘펜타곤 페이퍼’로 불린다. 폭로 이후 문서 오용 및 절도죄로 15차례 기소됐고 정부로부터 불법도청과 정신병력 조사 등 탄압을 받았지만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 73년 방면된 뒤 반전·반핵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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