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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독립운동 사료 6000점 기꺼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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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일 오후 7시 서울 낙원동 이문학회 사무실. 아담한 전통 한옥이다. 회원들은 매주 목요일 이곳에 모여 사마천의 '사기요선(史記要選)'('사기'의 핵심을 간추린 책)을 공부한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16명. 소설가.사진작가.국악인.회사원.주부 등 구성도 다양하다.

참석자들은 이날 '진귀한' 물건을 보았다. 스승인 이구영(86)옹이 금고 속에 간직해온 것들이다. 우선 한복판에 'ㄴ' 자가 뻥 뚫린 '시전(詩傳)' 세 권이 눈에 띄었다. 이옹의 작은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조승(1873~1900)이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을 따라 만주를 오갈 때 권총을 숨겨놓았던 책이다. 100여 년 전 긴박했던 정세가 그대로 느껴졌다.

색바랜 편지 뭉치가 담긴 보자기도 있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섰던 의병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이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격분한 유생들이 항일을 기치로 뭉쳤던 을미의병(1895년) 이후 중국 만주로 건너갔던 유인석이 조국의 동료에게 부친 편지 '동문 사우에게 드린다(與同門士友)' 등이 들어왔다.

이 옹의 제자이자 자료를 정리 중인 서지학자 김영복(문우서림 대표)씨는 "선생님께서 보존해온 의병 관련 문건은 1000여 점에 이른다"고 말했다. 또 "스승은 이 자료들을 편찬.번역한 '호서의병사적''의병운동사적' 등을 냈으나 아직 번역 안 된 문건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 옹은 20세기 한국사의 '압축 파일'이다. 충북 제천에서 천석꾼 갑부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제식민지 시절 사회주의에 빠졌다. 6.25 전쟁 당시 월북했다가 58년 남파됐다. 곧바로 체포됐고, 80년 5월 출감될 때까지 22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이후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84년 현대판 서당인 이문학회를 세우고 동양 고전 강독, 한문 강의에 노년을 바쳤다. 수감 시절 그에게 배웠던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 경남대 심지연 교수 등 그간 거쳐간 제자는 1000여 명에 이른다.

이 옹이 대대로 물려받은 각종 자료 6000여 점을 그의 고향인 제천에 세워질 의병도서관에 기증한다. 선대들이 공부했던 고서.문집 1000여 점, 옛사람들의 일상을 일러주는 편지 3000여 점 등이 포함됐다. 그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의병.독립운동 관련 자료다.

이 옹은 요즘 노환을 앓고 있다. 매주 두 차례 정도 병원을 다닌다. 2일 만난 이옹은 그래도 예의 꼿꼿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말을 꺼내기도 힘겨워 보였으나 자태만은 반듯했다.

"여력이 있으면 의병사를 한번 써보고 싶었으나 유능한 후학들에게 넘겨야 할 것 같아요. 그간 보존해온 자료를 모두 의병도서관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세상 물건은 나 혼자 소유하는 게 아니죠. 여럿이 나눠 봐야 해요."

손자 식열(32)씨는 "할아버지는 사회주의.자본주의 이념을 떠나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회를 기원하셨다"며 "할아버지께선 평소 이번 기증을 여생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문학회 현판에는 '의병정신선양회'라는 문구가 함께 써 있다. 의병 연구에 대한 이 옹의 열정을 대변한다. 선친 이주승(1870~1946)은 의병장 이강년(1858~1907)의 문관으로 있으면서 의병진에 막대한 군자금을 댔고, 비밀연락 업무도 맡았다. 작은아버지 이조승은 유인석의 활약상을 기록한 '서행일기(西行日記)'를 남겼다.

오늘날 의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념논쟁이 끊이지 않는 요즘 사회에 이 옹은 어떤 당부를 하고 싶을까.

그는 말을 아꼈다. "옛것이나 지금 것이나 모두 중요합니다. 문제는 꾸준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충의(忠義)가 생겨요.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몸이 불편한 이 옹에게 질문을 계속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의 소신은 '의병운동사적'같은 저서, 이문학회 회보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하나의 이념은 다양해진 사회를 아우를 수 없다. 문제는 주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옛날 의인들은 시류를 타지 않았다. 한뜻으로 뭉쳐 국난을 극복한 의병들처럼 남과 북도 민족공동체 정신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

이 옹의 자료는 다음주 초 제천 의병도서관에 기증된다. 도서관은 6, 7월께 문을 열 예정이다. 김흥래 관장은 "이옹은 제천 의병운동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해주신 분"이라며 "이번 기증품을 별도의 공간에서 관리, 의병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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