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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시한폭탄' 뇌관에 끝내 불붙인 트럼프

중앙일보

입력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시한폭탄 같던 예루살렘의 지위 문제를 놓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끝내 뇌관에 불을 붙였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지옥의 문을 연 결정”이라고 맹비난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본격적으로 ‘세계의 화약고’로 떠올랐다.

트럼프 "예루살렘이 공식 이스라엘 수도" 선언 #텔아비브 미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도 지시 #미 언론 "70년간 이어져온 외교 정책 뒤집어" #전 CIA 국장 "역사적 실수. 미국에도 손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지옥의 문을 연 결정" #터키 미 영사관 앞 항의시위…미 국기 불태워 #메이 영국 총리, EU 등도 "동의 못한다" #유엔 안보리 8일 긴급 회의 개최 #테러 우려 커지는 등 중동 혼란 #중동 분열돼 일치된 대응 어려울 듯 # #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백악관 회견에서 “이제는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할 때"라고 밝혔다. 이스라엘 총리 관저, 대법원 등 정부 기관들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설명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결정이 “현실을 인정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은 공약을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지킨다”며 “오늘의 조치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평화 추구에도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평화 프로세스의 진전과 지속적인 평화협정을 위해 오래 전에 진작 했어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예루살렘 전체가 수도라는 이스라엘과 동예루살렘이 이스라엘에 병합됐지만 본래 자신의 영토였고 향후 수도로 삼겠다는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명백히 이스라엘의 편을 든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

트럼프 미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텔아비브에 있는 이스라엘 주재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할 것도 국무부에 지시했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대사관 이전을 6개월 보류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한 예루살렘이 서예루살렘을 말하는지, 동예루살렘까지 포함하는지는 불투명하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 세계가 우려를 표하는데도 입장 발표를 강행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중동은 혼란으로 빠져들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 모두 동의한다면 ‘2국가 해법’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2국가 해법은 1967년 정해진 경계선을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를 각각 건설해 영구히 분쟁을 없애자는 평화공존 구상이다. 하지만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7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미국의 외교 정책을 트럼프가 뒤집었다고 미국 언론들은 보도했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이번 결정으로 미국은 중재 역할을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가자지구 난민 캠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EPA]

가자지구 난민 캠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EPA]

테러 등 유혈사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당장 항의 시위가 빗발쳤다. 터키 이스탄불의 미국 영사관 앞에는 1500명 가량이 몰려들어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살인자 미국은 중동에서 떠나라”고 외쳤다. 터키 수도 앙카라의 미 대사관 밖에서도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시위에선 미국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불탔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유대교인들이 예수의 탄생지라고 믿는 베들레헴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전등을 꺼버리기도 했다. 영국 팔레스타인 연대 그룹은 8일 런던 미 대사관 앞에서 성토 집회를 연다. 전 세계 미 대사관과 영사관은 경계 태세에 들어갔고, 중동과 유럽에선 자국민에게 폭력 시위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요르단은 팔레스타인과 공동으로 아랍연맹(AL)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했고, 터키는 이슬람협력기구(OIC) 긴급회의를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방문했다. [AP]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방문했다. [AP]

서방에서도 우려와 비판이 쏟아졌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성명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의 미래 수도로서 예루살렘의 지위 문제는 협상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미국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동의 평화를 기대하는 관점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알제리를 방문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유감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셰이크 모하마드 빈 압둘라흐만알타니 카타르 외교장관은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라고 평가했다. 시아파 맹주인 이란은 아랍권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예루살렘은 당사자 쌍방의 직접 협상으로 풀어야 할 마지막 단계의 과제”라고 우려를 표했다. 볼리비아, 이집트, 프랑스, 이탈리아, 세네갈, 스웨덴, 영국, 우루과이 등 8개국의 요구로 안보리 15개 이사국은 8일 긴급회의를 열어 이번 사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스라엘 국기 너머로 예루살렘 올드 시티가 보인다. [EPA]

이스라엘 국기 너머로 예루살렘 올드 시티가 보인다. [EPA]

트럼프의 선언에 대해 워싱턴포스트(WP)는 “이스라엘 국민과 자신의 국내 정치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순 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결정으로 이란을 겨냥한 이스라엘과 아랍 수니파 국가 간의 암묵적 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어렵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미국이 중재하는 이스라엘과의 협상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이나 중동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트럼프가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고 WP는 내다봤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사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외교적 파괴행위”라며 ”누구에게도,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존 브레넌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무모한 결정이자 역사적으로 큰 실수”라며 “앞으로 몇 년간 중동 내 미국의 이익을 크게 해치고 지역의 불안정성은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사진에 엑스표를 하고 미 국기를 불태우는 시위대 [가디언 캡처]

트럼프 미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사진에 엑스표를 하고 미 국기를 불태우는 시위대 [가디언 캡처]

예루살렘 문제는 분열 양상을 보여온 아랍권 국가들이 거의 유일하게 한목소리를 내던 의제였다. 하지만 AP통신은 아랍권 국가들이 독기 서린 수사를 써가며 미국의 결정을 규탄했지만 정작 취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는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부닥쳤다고 지적했다. 아랍권 강대국들은 패권 다툼이라는 진흙탕에서 허우적대고 있고, 국민은 오랜 내전에 나가떨어졌다. 극렬한 시위와 폭력사태가 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외에 아랍세계가 트럼프 맞설 방법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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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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