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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천수이볜의 빨라진 '독립' 행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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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000년 민진당 소속 천수이볜(陳水扁)이 국민당 후보 롄잔(連戰)을 누르고 총통에 당선된 이후 대만의 '독립'을 향한 행보는 보다 두드러졌으며 특히 2004년 천의 총통 재선 이후 그 속도가 가일층 빨라졌다. 몇 년 전 대만에서 발행하는 여권의 앞면에는 기존에 써왔던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대신에 '타이완(Taiwan)'이라는 명칭이 새로이 명기됐고, 최근에는 내정부(內政府) 산하의 출입국 관리기구의 이름을 출입경관리국(出入境管理局)에서 출입국이민서(出入國移民署)로 분리, 승격시키면서 주권국의 면모를 보다 부각시키고 있다.

급기야 지난달 27일에는 천 총통이 직접 최고 통일정책기구인 통일위원회의 활동을 '중단[終止]'하고 통일강령의 적용 종식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에 설치된 통일위원회는 천의 총통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회의가 열린 적이 없어 사실상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조직에 불과했지만 이번에 그 실질적 '폐지'가 이뤄짐으로써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클 수밖에 없다.

천수이볜이 통일강령의 '적용 종식'을 선언한 것이 자신의 총통 당선 당시 제시했던 '4불 1무'(四不一無), 즉 중국의 무력사용이 없다는 전제 하에 대만도 독립선포, 국호 변경, '양국론'의 입헌과 독립의견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 등의 네 가지를 않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명시적인 독립보다는 소위 '천천히 스며드는 방식의 분리(creeping separation)'를 실행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이르면 1~2년 안에 미 7함대의 도달 이전에 대만에 대한 봉쇄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것이라는 전망이 천의 행보를 가속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중국과 미국은 천의 이러한 '초강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 정부는 이미 2000년에 대만의 독립 강행 시 무력 사용 가능성을 국무원 대만판공실의 정책선언을 통해 밝힌 바 있고, 2005년 3월에는 '반국가분열법'을 입법해 대만의 독립선언 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까지 마련해 놓은 상황이다. 관건은 대만의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무력 사용의 '레드라인'으로 적시할 것인가다.

미국 또한 천의 정책에 전례 없는 강경한 경고를 발동했으며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설득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미국의 견제와 중국의 위협으로 천 총통의 행보가 소폭의 진전만을 이루고 다시 소강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라크와 이란에 온 관심이 쏠려 있는 미국이나 단기적으로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중국에 천의 '도발'은 반갑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2001년의 EP-3 정찰기 충돌 사건 이후 양안 간의 돌발 사태를 포괄하는 여러 상황에서 양자 간의 긴급한 의사소통에 대해 많은 연구와 진전을 이뤄왔기에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개연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양안 간의 무력사태는 엄연히 현존하는 가능성이며, 최악의 사태에 대한 최소한의 가능성에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라면 양안 사태의 추이가 북핵 문제에 대한 미.중 간의 '협력'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 또 여기에서 '전략적 유연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관련해 한국의 외교 당국에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정재호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