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노력과 실현할 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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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화합추진위가 5일 전체 회의에서 지난 20일간의 활동결과를 중간 결산하는 건의내용을 결정했다. 민화 위는 노태우 차기대통령이 취임할 오는 25일까지 남은 20일간 민주발전, 국민화합, 사회개혁 등의 분야에 대한 토의를 계속해 위원회의 집약된 의견을 노 다음 대통령에게 건의할 예정이다.
일찍이 있어 본 일도, 시도된 일도 없는 민화 위라는 이름의 이 기구에 대해 당초 일부에서는 과연 무슨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논의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는지 반신반의했던 게 사실이고, 각계 원로·중진인사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국민화합 방안을 논의한다니 미상불 나쁜 일은 아니라는 정도로 치부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이 말 그대로 집권당이나 노 차기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초당적으로 의견 개진을 할 것인가 하는 점과 이 시절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제를 과연 정면으로 다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 주목대상이었다.
그러나 지난 20일간의 민화 위 활동을 보면 초기의 반신반의나 낮은 기대는 지난날 대개 그렇고 그렇게 끝난 각종 자문기구에서 갖게된 일종의 고정관념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민화 위에서는 광주사태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갈등요인을 놓고 진지한 토론이 거침없이 벌어졌고, 다음 정부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비교적 강도 높게, 수준 높게 의견들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심지어 조총련이 만든 비디오 테이프까지 보고 피해자들을 다수 초청해 증언을 들었다.
사태가 있은 후 실로 8년만에 비로소 생생한 증언과 진상에 접근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국민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간혹 증언과 증언이 서로 엇갈리고 민화위원들이 듣기 거북한 소리까지 나와 문제의 해결방안에 의견집약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광주사태에 관해 이만한 발언과 노력이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평가받아 마땅하다.
문제를 거르고 보다 넓은 공감대를 확보하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할 말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말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민화 위는 빨리 결론이 안나온다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좀더 인내심을 가져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주사태뿐 아니라 민화 위는 새 정부가 할 일로 고문·불법연행 금지 등 인권보장 책과 사법부의 독립성 강화, 정보정치 지양, 지방자치 전면 실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 광범한 건의를 하기로 했다.
민화 위의 이런 건의가 국민화합과 권위주의 청산을 위해 필요한 내용을 다 담았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하나같이 필요하고 중요한 사항임에는 틀림없다.
노 차기 대통령은 민화 위가 제시하는 방안을 국정운영의 뼈대로 삼겠다고 약속한대로 민화 위의 이런 건의를 대소정책에 흔연히 반영, 실천하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설혹 민화 위의 주문이 현 단계로서는 실시가 어려운 다소 이상적 경향이 있더라도 단계적 접근으로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민화 위의 활동은 확실히 과거우리가 본 수많은 각종 자문기구의 그것과는 다르다. 앞으로 구성될 국가 원로자문회의나 다른 자문기구도 민화 위의 운영과 토론방식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민화 위는 남은 20일 동안 더욱 성의 있고 절실한 문제의식으로 광주사태 해결책은 물론, 경제정의·이념 갈등을 포함한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폭넓은 토론과 방향제시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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