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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사과한 '약촌오거리 사건' 항소심도 징역 1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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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사진 영화사]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사진 영화사]

17년 전 범인이 뒤바뀐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진범 김모(37)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원심과 같은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김씨는 기소 이후 줄곧 "살인범 누명을 썼다"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살해로 볼 만한 증거가 충분하다"며 중형을 내렸다. 이 사건은 문무일 검찰총장이 역대 검찰총장으론 처음으로 과거 검찰의 잘못된 수사 사례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고, 영화 '재심'의 소재가 되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재판부 "살해 증거 충분하다" 원심 유지 #"피와 흰 지방 묻은 칼 봤다" 진술 채택 #2000년 전북 익산 택시기사 살인 사건 #검·경 '강압·부실 수사' 논란 끊이지 않아 #16살 다방배달원 10년간 '억울한 옥살이' #지난해 재심서 무죄…검찰, 진범 김씨 체포 #문무일 검찰총장, 8월 "과오 인정" 사과 #올 2월 개봉한 영화 '재심' 모티브 되기도

광주고법 전주1형사부(부장 황진구)는 1일 오후 2시 전북 전주시 덕진동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8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된 김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징역 15년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당시 범행 상황에 대한 피고인과 참고인들의 진술이 대부분 일치하고 구체적인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들 진술이 증거 능력이 없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사진 영화사]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사진 영화사]

재판부는 "택시기사가 살해된 날 새벽 피고인이 피 묻은 옷을 입고 사건 현장에서 400m 떨어진 친구 임모씨 집에 왔다" "피고인이 가져온 식칼은 끝이 휘어져 있고, 칼끝에는 피와 돼지 비계 모양의 흰색 지방이 묻어 있었다" 등 김씨 친구 등의 진술을 유죄의 근거로 판단했다. 재판장인 황진구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나중에 '그 칼은 닭 도축장에서 가져왔다'고 진술을 번복했지만 '피와 지방이 묻은 칼을 친구 임모씨에게 건넸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며 김씨가 택시기사를 살해한 진범임을 분명히 했다.

검찰은 지난달 14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김씨에 대해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당시 김씨 측 변호인은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피해자를 피고인 혼자서 제압해 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호소했다. 또 피고인의 지문이 택시에서 나오지 않은 점, 흉기가 숨겨진 침대 매트리스에서 피해자 혈흔이 나오지 않은 점 등도 김씨에게 유리한 정황으로 봤다. 김씨는 당시 최후 변론에서 "이 사건의 진짜 범인은 지금도 밖에서 돌아다니며 이 상황을 보며 웃고 있을 수 있다. 거짓말을 했다고 살인범이 돼야 하는 건 아니다"며 재판부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사진 영화사]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재심'의 한 장면. [사진 영화사]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은 소중한 생명을 잃게 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항소심에 이르기까지 반성은커녕 범행을 부인하며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만큼 엄벌이 불가피하다"며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면서도 "사건 발생 시점이 2000년으로 2010년 개정되기 전인 구(舊)형법을 적용해 살인의 유기징역 상한인 징역 15년을 선고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옅은 녹색 수의 차림에 흰색 고무신을 신고 법정에 나타난 김씨는 선고 내내 담담한 표정이었다. 선고가 끝나고 김씨가 퇴정하자 방청석에서는 김씨의 친어머니나 이모로 추정되는 중년 여성이 큰소리로 울었다.

김씨는 지난 2000년 8월 10일 오전 2시7분쯤 전북 익산시 영등동 약촌오거리에서 택시기사 유모(당시 42세)씨를 흉기로 12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당초 이 사건은 초기부터 검찰과 경찰의 부실·강압 수사 논란을 일으켰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월 서울 여의도 IFC몰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영화 '재심'을 관람하기에 앞서 영화의 실제 모델인 박준영 변호사(왼쪽) 등과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월 서울 여의도 IFC몰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영화 '재심'을 관람하기에 앞서 영화의 실제 모델인 박준영 변호사(왼쪽) 등과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검찰은 인근 다방의 커피 배달원이었던 최모(34·당시 16세)씨를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최씨가 오토바이를 몰고 가던 중 택시기사 유씨가 욕설을 한데 격분해 흉기로 살해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최씨는 2001년 5월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이 확정돼 2010년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법원의 확정 판결 이후에도 '진범이 따로 있다'는 등의 제보가 이어지면서 부실 수사 논란은 계속됐다. 2003년 재수사에 나선 군산경찰서는 김씨 등 2명을 진범으로 지목해 긴급체포했지만, 검찰은 진술 번복과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이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 8월 8일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 15층 회의실에서 대검찰청 출입기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문 총장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신인섭 기자

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 8월 8일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 15층 회의실에서 대검찰청 출입기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문 총장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신인섭 기자

최씨는 2013년 3월 "경찰의 강압 수사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며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2015년 12월 재심을 확정했다. 최씨의 재심 변론은 '삼례 나라수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등 수차례 재심에서 무죄를 이끌어낸 박준영(43) 변호사가 맡았다.

광주고법은 지난해 11월 17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최씨에 대한 재심에서 "당시 피고인이 자백한 살해 동기와 경위가 객관적 합리성이 없고 목격자의 진술과 어긋나는 등 허위 자백일 가능성이 크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10년간 옥살이를 한 최씨가 16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최씨는 무죄를 선고받은 뒤 "살인범이라는 꼬리표가 가장 힘들었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고 울먹였다.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 등 과거사에 사과하는 문무일 검찰총장. [연합뉴스]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 등 과거사에 사과하는 문무일 검찰총장. [연합뉴스]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최씨에게 무죄가 선고된 지 4시간 만에 경기도 용인에서 진범 김씨를 체포했다. 사건 이후 이름까지 바꾼 김씨는 검찰에서 "2013년 경찰 조사 때 내가 '살인했다'고 진술한 것은 이혼한 뒤 나와 동생들을 돌보지 않은 부모에게 고통을 주고 관심을 받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는 또 "친구와 재미로 범행 방법 등에 대해 각본을 짜듯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친구가 내가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이야기해 진범이라는 소문이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피해자 부검 결과 및 법의학 전문가들의 소견, 참고인 및 목격자 진술 등에 비춰 김씨의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구속기소했다. 지난 5월 1심을 맡은 전주지법 군산지원 형사1부(부장 이기선)는 "죄가 무겁다"며 김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김씨는 "살인을 한 적이 없고,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다.

지난해 11월 17일 광주고법에서 열린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살인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모(33·오른쪽 두 번째)씨와 변론을 맡은 박준영(왼쪽 두 번째) 변호사 등이 법원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진 박준영 변호사]

지난해 11월 17일 광주고법에서 열린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살인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모(33·오른쪽 두 번째)씨와 변론을 맡은 박준영(왼쪽 두 번째) 변호사 등이 법원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사진 박준영 변호사]

앞서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 8월 대검 출입기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검찰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일부 시국 사건 등에서 적법 절차 준수와 인권 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검찰 측은 문 총장이 지목한 시국 사건에 대해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 '인혁당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검찰 조직의 수장이 과거 검찰이 한 수사에 대해 '과오'를 인정한 첫 사례였다. 약촌오거리 사건은 배우 강하늘과 정우가 주연을 한 영화 '재심'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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