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장관·의원의 들러리 세우려 불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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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 부모 모임'의 대표인 A씨에게 23일 하루는 바빴지만 허탈한 하루였다.

A씨를 비롯한 이 모임 소속 부모 5명은 이날 오후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의 초청을 받고 국회로 갔다. 이들에 따르면 진 의원 측이 전날 밤 "법사위 소속 의원들과 성폭력 특별법 개정에 관해 간담회를 주선할 테니 의원실로 오라"고 연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국회에 도착하자 진 의원 측에선 3장짜리 성명서를 먼저 건넸다. 진 의원 측이 기자회견용으로 미리 작성해 둔 것이었다. 부모들은 엉겁결에 방송카메라 앞에서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한 부모는 "기자들과 만난다는 얘긴 들었지만 카메라까지 있는 정식 회견인 줄은 몰랐다"며 "얼굴이 알려지면 어떡하느냐"고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회견 때 얼굴을 내비친 진 의원과 같은 당 박세환 의원은 회견이 끝나자 다른 일정을 이유로 곧바로 사라졌다.

이후 부모들은 의원회관에서 40여 분을 머무르며 법사위원과의 간담회를 기다렸지만 의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진 의원 측이 그때야 부랴부랴 법사위원 섭외에 나섰지만 한 명도 성사되지 않은 것이다. 천안에서 올라온 한 부모가 "바쁜 시간을 쪼개 왔는데 이게 뭐냐"고 항의하자 진 의원 측 관계자는 "업무상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들 부모를 찾는 사람은 또 있었다. 부모들이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여성부의 지원을 받는 한 아동 성폭행 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장하진 여성부 장관이 만나고 싶어하니 빨리 와달라"고 수십 통의 전화를 했다. 결국 독촉 전화에 쫓겨 부모들은 오후 4시쯤 의원 면담을 포기하고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지원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장관과 의례적인 짧은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이었다.

A씨는 "용산 아동 성폭행 피살사건이 터지니까 정부.정치권 등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다"며 "자기들 생색내는 데 상처 입은 부모들을 이용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2년 동안 수차례 국회.법무부.경찰청 등지에서 시위를 하면서 아동 성폭행 가해자의 처벌을 강화해 달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아동 성폭행을 근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큰 사건이 터질 때만 반짝하는 호들갑이 결코 아니다.

김호정 사회부문 기자 <wisehj@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 바로잡습니다

2월 25일자 4면 취재일기 '장관.의원 들러리 세우려 불렀나'기사 중 성폭력 피해아동 부모들이 여성가족부 장하진 장관과 만난 시간이 10분 남짓이었다는 부분에 대해 여성가족부는 "약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고 해명했습니다. 여성가족부는 또 부모들이 갑작스럽게 약속을 통보받았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약속이 사전에 잡혀 있었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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