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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굵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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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2011년 3월 11일 규모 9.0 동일본 대지진을 현장에서 경험했다. 그것도 진원지 ‘도호쿠’에 도착한 지 두 시간 만에 ‘당했다’. 거대 지진이 몰려오기 1분 전 갑자기 호주머니 안 휴대전화에서 ‘삐-삐-삐-’ 하는 연속음이 울렸다. ‘재해예보 알림’ 벨이었다. 그리고 10초도 안 지났을 때였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엄청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책상을 붙잡고 쓰러졌다. 옆의 지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나도 그랬을 것이다) “으악, 으악”을 연발했다.

지진의 진짜 공포는 규모가 아닌 길이 #적폐청산도 길어질수록 피로, 위기 고조

하지만 가장 큰 공포는 규모가 아니었다. ‘길이’였다. 당시 지진은 본진만 190초(3분10초) 계속됐다. 30초 지날 때 “음, 이제 그치겠지”라고 생각했다. 2분이 지나갈 때 “어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3분이 지나갈 땐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음 날 새벽 4시30분 진도 6 여진의 공포는 더했다. 전기·수도·통신이 모두 두절된 암흑 속 호텔 방에서 맞은 여진은 무려 4분 넘게 계속됐다. 그땐 “죽었구나” 생각했다.

반면 1995년 한신 대지진은 규모가 7.3. 하지만 본진 시간은 불과 15초(포항은 약 10초)였다. 두려움을 느낄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그래서 “어차피 (지진을) 당할 거면 짧고 굵은 게 낫다”는 일본 지인들의 농담 반 진담 반이 난 이해가 간다. 공포는 ‘불확실성의 시간’에 비례한다.

요즘 우리 정치판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세종로(청와대), 내곡동(국정원), 서초동(검찰청)을 진원지로 한 ‘트라이앵글 강진’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시든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구속의 계절’이다. ‘전 정권 손보기’는 후진적 통과의례가 됐다. 고대 중국 사마천의 ‘군자보구십년불만(君子報仇十年不晩·군자는 10년이란 긴 세월이 걸리더라도 꼭 복수해야 한다)’이란 2000년 전 말을 금과옥조인 양 아직까지 충실히 따르고 있는 나라는 아마 우리와 중국 정도 아닐까.

미국이라고 왜 ‘전 정권 부정’이 없겠느냐마는 접근법이 다르다. 처벌·보복이 아닌 정책 변경이다. 카터 미 대통령은 77년 정권교체 후 진보 진영으로부터 캄보디아 비밀폭격, 칠레 정권 전복 사주 혐의가 드러난 전 공화당 정권의 키신저를 처벌하라는 요구를 집요하게 받았다. 하지만 카터는 “이 문제를 더 끌면 정권엔 좋겠지만 국가에 안 좋다”며 6개월 만에 논란을 마무리했다. 아무도 못 말리는 트럼프조차 ‘오바마 부정’은 정책을 통해서다.

신정권 출범 6개월. 보다 소중한 가치를 되돌아볼 때다. 현 정권은 출범 전 입이 닳도록 ‘검찰 개혁’을 외쳤다. 하지만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검찰은 ‘적폐청산’의 칼잡이가 돼 전 정권 때보다 더 권력지향적 칼을 휘두르고 있다. ‘논두렁 시계’식 피의사실 공표도 마다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제어를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이런 적반하장, 본말전도가 따로 없다. 이게 진정 국민이 기대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원했던 검찰의 모습일까.

국민이 고대했던 ‘일자리 정부’는 또 어디로 갔나. 청년실업률이 매달 사상 최고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도 가타부타 대책조차 없다. 국정원장을 잡아넣건 국가안보실장을 잡아넣건 정권의 자유지만 초반 6개월이면 족하다. 시간이 갈수록 국민의 피로, 국가의 위기는 고조되기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피로감이 누적되기 때문이다. 임기 내내 정책은 돌보지 않고 ‘과거 청산’으로 일관하다 국민·국가 모두 IMF의 골로 갔던 게 정확히 20년 전 오늘이다. 지진과 전 정권 손보기의 공통 경험칙, ‘없는 게 최선, 있더라도 짧고 굵게’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