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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전쟁 시즌’ 영업사원 된 공무원들…국회 찾아와 “칼질 막아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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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예산 칼질’의 시즌을 맞고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지난 14일부터 예산안 등 조정소위원회를 열고 429조원 규모의 내년도 정부 예산 세부심사에 들어갔다. 각 상임위에서 넘어온 예산안이 이 과정에서 삭감ㆍ증액 등 본격적인 조정 과정을 거친다.

국회 ‘예산 정국’ 백태 #줄줄이 국회 찾은 지자체장, 진 치는 실무자들 #공무원 “3~4시간 기다려 보좌진 만나 사업타당성 설명” #보좌진 “하루에도 수십명 찾아와 힘들어”

2018년도 예산안 심사를 위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1차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가 지난 14일 오후 열렸다. 박종근 기자

2018년도 예산안 심사를 위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1차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가 지난 14일 오후 열렸다. 박종근 기자

국회는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소속 공무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예산전쟁의 최종관문 격인 조정소위에 참여하는 국회의원들이 사실상 내년 예산의 운명을 쥐고 있어서다. 공무원 입장에선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소위 의원 15명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기간에는 의원과 보좌진이 ‘슈퍼 갑(甲)’인 만큼, 공무원들은 이들에게 사업타당성을 설명하며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영업사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국회 본청과 의원회관에는 지자체장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김기현 울산시장은 지난 14일 국회에서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 내년도 울산시 국비사업 예산의 증액을 요청했다. 허성곤 김해시장도 지난 10일 여야 의원들을 상대로 시 현안사업을 설명한 뒤 국비 지원을 거론했고 송하진 전북도지사(9일), 유정복 인천시장(8일), 문동신 군산시장(6일), 정헌율 익산시장(3일) 등도 국회를 찾았다.

예산안 조정소위가 열리는 국회 예결위 회의실 앞은 각 부처에서 나온 공무원들로 가득했다. 의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거나 회의 결과에 대한 빠른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김록환 기자

예산안 조정소위가 열리는 국회 예결위 회의실 앞은 각 부처에서 나온 공무원들로 가득했다. 의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거나 회의 결과에 대한 빠른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김록환 기자

실무진인 사무관과 과장급 직원들은 아예 국회에 진을 치고 있다. 예산안조정소위 심사 첫날(14일) 오후 국회 본청 6층 회의실 앞은 공무원들로 가득했다. 의원들이 지나가면 일단 눈부터 마주치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한 공무원은 “초비상 상황이라 오전부터 (국회에) 와서 점심도 거르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장관께 (심사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회의 시작과 함께 안에서 개의를 알리는 의사봉 소리가 들리자 다른 공무원은 “(의사봉) 소리만 들려도 불안하다. 혹시라도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 어쩌나 싶다”고 토로했다.

공무원들의 ‘예산 영업’은 의원회관에서도 벌어진다. 예산안조정소위에 소속된 각 의원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수십명의 민원인들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예산을 따내기 위해 국회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는 공무원들이다. 한 공무원은 “오전에 국회에 나와 예산안조정소위 소속 의원실(의원회관)을 한바퀴 돌고 오후엔 본청 회의실 앞에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기다린다”며 “회의가 끝난 뒤에는 다시 의원회관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말했다. 짧게는 5분, 길게는 20분 가량 의원실 보좌진들을 만나 부처나 지자체 사업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예산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이들의 임무다.

의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의원회관 곳곳에도 공무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좌진을 만나 예산과 관련된 사업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는 건 예사다. 김록환 기자

의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의원회관 곳곳에도 공무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보좌진을 만나 예산과 관련된 사업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는 건 예사다. 김록환 기자

한 여당 의원실 보좌관은 “매년 예산 정국이 되면 벌어지는 일”이라며 “야당에서 삭감 쪽으로 방향을 끌어가고 있어서 (공무원들이) 이를 막아달라는 요청을 주로 하는데, 의원님을 만나긴 힘드니 서너 시간씩 기다렸다가 보좌진들을 만나 디펜드(방어) 쳐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찾아오는 분들이 너무 많아 (보좌관·비서관이) 직접 만나진 않고 비서 선에서 미팅이 이뤄진 뒤 우리는 내용 보고만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른 야당 의원실 보좌관은 “(예산의) 삭감 규모를 줄여달라며 나름대로의 사업 타당성을 설명하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예산안조정소위에서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뒤 돌려보내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 보좌진들에게는 예산 심사 때 찾아오는 공무원들을 문전박대하기도 어렵지만 이들이 가져오는 음료ㆍ과일 등 선물을 덜컥 받는 것도 경계대상이다. 한 보좌진은 “요즘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여러 경로를 통해 ‘저 의원실 진상’이라거나 ‘갑질 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져 힘들더라도 일단은 (공무원들을) 만나야 한다”며 “‘슈퍼 갑’ 역할 해보는 것도 예산안 법정 처리 시한(12월 2일)까지 보름 정도라 웬만하면 마찰 없이 좋게 가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록환 기자 roka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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