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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 탄생 "화해와 일치 통해 공존의 길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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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2일 정진석 새 추기경을 임명한 직후 바티칸을 찾아온 삼소회(불교·천주교·원불교 여성 수도자 모임)의 천주교 곽 베아타 수녀(왼쪽 가운데)와 원불교지정 교무(왼쪽 아래)를 축복하고 있다. 로마=서정민 특파원

온유.관대.화목. 정진석 신임 추기경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크고 넉넉한 몸집에 트레이드 마크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 영락없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다.

그는 '옴니버스 옴니아 (모든 이에 모든 것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사목 지표로 삼아 왔다. 모든 이를 감싸안는 부드러운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온화한 성격으로 그는 남의 말에 경청하고 누구와도 갈등 없이 지낸다는 이미지를 가톨릭 안팎에 심어 왔다.

외양과 달리 정 추기경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교회법의 국내 최고 권위자다. 평생의 역작 '교회법 해설'을 무려 15권 펴냈다. 한국 교회법의 바이블이다. '교회법과 사회법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한 정 추기경은 그래서 교회법 학자로 불러야 맞다. 보수적인 교회법에 정통한 까닭에 일부에선 보수적이라 평하기도 한다. 그의 역.저서는 30여 권에 달한다. 이 모든 업적은 그의 탁월한 라틴어 실력으로 가능했다. 아직도 천주교회의 학문 영역에선 라틴어가 중요하다.

정 추기경은 최근 사학법과 관련해 반대 의사를 적극 표명했다. 그는 지난달 19일 명동성동 주교관을 찾은 김진표 교육부총리에게 "사학 비리는 시장경제원리에 적용하면 해결된다. 학생의 학교 선택은 기본적인 인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면담에서 "사학의 기본 취지는 자유와 자율"이라고 비판했다.

정 추기경은 또 2004년 4월 탄핵정국으로 어수선하던 당시 "탄핵문제로 국론 분열이 심각한 이때 화해와 일치를 통해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2004년 성탄메시지에서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민생경제의 회생"이라며 "이제부터라도 정치권은 현실을 직시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 추기경이 가장 강조하는 대목은 생명이다. 그래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강하게 반대한다. 그는 지난해 6월 황우석 교수가 명동성당을 찾았을 당시 "난치병 환자 치료에 헌신하는 황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면서도 "그러나 할 수 있다고 해서 무엇이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생명윤리의 훼손으로 이어진다"고 꾸짖었다.

성장기 정 추기경은 과학자 지망생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발명가의 꿈을 꾸었으나 6.25라는 민족비극에서 체험한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를 성직자의 길로 이끌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가 생명을 파괴하는 흉기로 돌변하고, 피란길에서 아우성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신의 섭리 등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새 추기경은 31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친가.외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다. 어머니가 아들이 주교가 되는 태몽을 꾸었다는 일화도 있다. 한국전쟁으로 인생의 방향을 180도 돌린 그는 가톨릭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61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울 중림동 본당 보좌신부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서울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비서신부, 성신고등학교 부교장 등을 거쳤다. 70년 로마의 성 우르바노 대학원에서 교회법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 주교 서품을 받고 국내로 돌아와 청주교구장에 착좌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과 함께 평양대교구장을 겸하며 사회적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는 남북 화해의 프로젝트를 한국 가톨릭이 해내야 할 가장 비중 있는 사회활동 목표로 설정해 놓고 교계를 독려해 왔다. 2년 전부터 2007년 경기도 파주에 세워질 '민족화해센터' 건립에 진력해 온 그는 "민족화해센터 프로젝트가 교계의 최우선 사업이자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초석이라는 인식"을 전파해 왔다. 미사 때도 강조했던 사안이다. 통일을 내다보는 이 프로젝트를 놓고 정 추기경은 2004년 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북 간 화해와 증오의 불식을 강조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본래 내 마음도 잘못 여는 게 인간인데, 우리는 이제 남의 마음, 그것도 증오를 증폭시켜온 분단 반세기의 얼어붙은 마음, 믿지 못하는 마음을 여는 작업에 길을 나섭니다"(중앙일보 2004년 12월 23일자 23면)

정 추기경은 자신의 이런 발언이 2000년 말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가 채택한 문건 '쇄신과 화해'의 정신을 적극 반영한다고 강조했다. IMF 직후인 9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을 당시 그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옛날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IMF 때문만이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다. 이 점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서) 필요한 역할을 다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추기경 임명으로 분단상황의 극복과 민족 화해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관측된다.

조우석 기자

◆ 저서=장미꽃다발(1961), 라디오의 소리(1963), 라디오의 메아리(1965), 목동의 노래(1969), 교계제도사(1974), 교회법원사(1975), 말씀이 우리와 함께(1986), 말씀의 식탁에서(1986), 전국 공용 교구 사제 특별권한 해설(1988), 교회법 해설 1~15권 등 총 28권

◆ 역서=성녀마리아 고레띠(1955), 종군 신부 카폰(1956), 가톨릭 교리 입문(1958), 억만인의 신앙(1960), 나는 믿는다(1962), 인정받은 사람(1963), 질그릇(1967), 영혼의 평화(1969), 강론집사목부록(1967), 칠층산(1976), 최양업 신부의 서한(1995), 김대건 신부의 서한(1997) 등 총 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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