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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요즘 이 책] "나는 소설로 쓰기 어려운 대상에서 전투력을 느낀다"

중앙일보

입력

 우리가 사랑하는 이 시대의 작가들은 요즘 어떤 책에 꽂혀 있을까. 일곱 번째 순서는 이야기꾼 소설가 성석제(57)다. 이야기꾼이라는 직능 명칭을 앞세운 이유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다. 그의 작품은 소설이라는 근대 예술 형식 창안 이전부터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던 보편적인 인간 심성을 건드린다. 그는 어떤 책을 선택해 소개할까. '작가의 요즘 이 책'은 3주 간격으로 토요일 새벽 업데이트된다. 성석제 편은 지난달 추석 연휴 때문에 예정보다 늦어졌다. 지금까지 김훈·정유정·김연수·권여선·조남주·은희경을 만났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 연재하는 작가 성석제 #"인생의 진실 독점하려 하지 않는 겸손한 영혼들" 그려 독자 공감 끌어내 #"전통 국악 가사 집대성한 책 『창악집성』 작가에게는 보물창고" # #

 그의 2008년 소설집 『지금 행복해』의 '작가의 말'을 패러디하면 지금까지 소설가 성석제를 "오고 가고 오가고 가고 가고 가고 가고 가고 오고 가고 또 가고 오"며 만났다. 과장이다. 어쨌든 여러 번 그를 만났다. 반드시 사람만이 아니라 작품을 포함해서다. 작품을 만난 것도 작가를 만난 거다.

 그를 만났던 날들 가운데 인상적인 두 차례 만남의 첫 번째는 대학 시절 그의 절친이었던 기형도(1960~89) 시인의 20주기 추모식이었다. 2009년 3월 7일(기형도의 기일이다). 안성 공원묘지를 추모 일행과 함께 다녀온 후 서울 신촌의 허름한 막걸릿집을 찾았다. 막걸리 몇 순배, 추위와 피로가 좀 가시자 80년대 대학가 스타일로 무반주 돌림노래 시간이 시작됐다. 성씨의 선택 곡은 생전 기형도와 듀엣으로 즐겨 불렀다는 슈만의 가곡 '2인의 척탄병'. 파트너가 없으니 혼자 부를 수밖에. 절창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구성진 음정처리를 기대했던 것 같다. 성씨의 노래는 기대에 반했다. 음정은 정확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가사발음이 지나치게 또박또박한 게 문제인 듯했다. 책 읽는 줄 알았다. 음정이 실리긴 했지만. 한데 듣다 보니 묘한 매력이 있었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맞닥뜨렸을 때처럼 정서보다는 두뇌를 활용해 공연을 감상하게 된다. 당연히 가사 내용에도 더 집중하게 됐던 것 같다. 성씨는 청중을 빤히 쳐다보며 노래를 부른다. 자기 노래에 스스로 취해 격하게 부르는 전통 가창이 아니라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며 행하는 가창이다. 술에 덜 취한 성씨의 그날 공연을 지나치게 견강부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성씨는, 이성적이다! 소설은 재미있지만 사람은 담백하다!(재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성석제씨가 서울 독산동에 살던 무렵. 왼쪽이 시인 기형도. 중간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1년 선배 이성겸씨라고 했다. [사진 성석제]

성석제씨가 서울 독산동에 살던 무렵. 왼쪽이 시인 기형도. 중간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1년 선배 이성겸씨라고 했다. [사진 성석제]

 두 번째 만남은 고고한 인간 지성이 인공두뇌 알파고에게 무참히 패퇴하던 지난해 3월. 영장계 대표 이세돌 기사가 특별 대국에서 내리 두 판을 진 직후였다. 아마 6단 기력(棋力)으로 문단의 대표급인 성씨를 전화 인터뷰했다. 핵심 메시지를 기사로 정리했다.
 이세돌 완승을 점쳤던 성씨는 누구보다 충격이 큰 듯했다. 상대 없는 대국(적어도 인간 상대는 없었던 거니까), 반전무인(盤前無人) 상황에서 이세돌 프로가 참혹할 정도로 외로웠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바둑 승부는 원래, 불완전한 인간 기사들이 서로 실수도 주고받으며,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후세에 남는 명국의 드라마를 남기는 동반자 관계를 전제로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 시절 성석제. [사진 성석제]

대학 시절 성석제. [사진 성석제]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허점투성이다. 불사도 아니다.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안타깝고, 아름다운 존재다. 그런 얘기였다. 성석제 소설은 실은 그런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한국 소설사를 통틀어 손꼽힐 만한 개성적 캐릭터 황만근이 그렇고, 2014년 장편 『투명인간』의 주인공 김만수가 그렇다. 어딘가 모자라지만 마음이 가는 사람들, '인생의 진실을 독점하려 들지 않는 겸손한 영혼들'(2010년 소설집 『인간적이다』에서), 소설이 그들에게 위안을 줄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함께 느끼고 있다고 애써 말을 건네주고 싶은 사람들이다(『투명인간』에서). 성석제는 인간적이다!

1979~80년 경북 상주 고향에서의 성석제. [사진 성석제]

1979~80년 경북 상주 고향에서의 성석제. [사진 성석제]

 '작가의 요즘 이 책'을 위해 성씨는 만난 건 지난달 16일이다. 그는 경기도 군포시 자택 근처의 한 카페로 오라고 했다. 요즘 주로 작업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8월부터 출판사 문학동네의 네이버 카페에 역사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주말 제외, 일일 연재 중이다. 조선 시대 숙종 연간을 배경으로, 또 하나의 김만수, 황만근 같은 인물을 내세운 작품이다. "당시 실제로 있었을 법한 상황, 인물로 그리려다 보니 문장이 자꾸 길어진다"고 했다.

1997년 서울 근교에서 찍은 사진. [사진 성석제]

1997년 서울 근교에서 찍은 사진. [사진 성석제]

 -지난해 가을 소설집 『믜리도 괴리로 업시』의 문장들은 짧았던 것 같은데, 작품에 따라 문체가 달라지나.
 "내가 만사에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쓸 때 대상을 별로 가리지 않는다. 편식은 심한데 소설을 쓸 때는 안 그렇다."
 -(동문서답인가. 우문현답인가)소재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건 소설로 쓰기 힘들다고 생각될 법한 대상에서 전투력이 생긴다고 할까."
 -일종의 도전의식?
 "그렇다. 가령 지금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이런 비소설적인 상황."
 -그럼 이 인터뷰도 나중에 소설로?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 견디고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전투력이다. 물론 그는 웃긴다. 사람보다 소설이 더.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과장하면 '예측 불가능성'이다. 그가 시로 먼저 등단해 시집을 두 권이나 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그의 91년 첫 번째 시집 『낯선 길에 묻다』에는 훗날 그의 소설에 무수히 등장하는 측은한 존재들이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그의 소설의 다채로움은 그가 양손에 하나씩 쥔 시와 소설의 장르 차이만큼이나 뚜렷하다. 가령 장편 『위풍당당』은 친환경소설이라 할 만하다. 인간 군상의 비루한 드라마 사이사이에 산과 강, 배롱나무와 올빼미 등 의연한 대자연 묘사를 끼워 넣었다. 역시 장편 『투명인간』은 수십 명은 될 것 같은 화자를 등장시켜 주인공 김만수의 일생을 모자이크한다. 소설집 『믜리도…』에서는 발 빠르게 요즘 트렌드인 성 소수자 문제까지 건드렸다.

 그가 독자들에게 추천한 책도 역시 허를 찌른다. 『창악집성』. 문학평론가 하응백씨가 판소리를 제외한 온갖 전통 성악(聲樂)의 노랫말을 집대성해 오류를 바로잡고 정리한 책이다. 1116쪽, 벽돌 두께다. 문학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물창고 같다나.
 우리가 성석제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린다면 웃기면서 감동적이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진부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성석제는 예측하기 어렵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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