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프라이팬이나 일반 오븐으로 스테이크를 구우면 마음처럼 잘 안 되잖아요. 겉은 금방 검게 타는데 속은 제대로 안 익어서 애먹는 경우가 많죠.”
지난달 개소해 R&D 인력 1500명 근무 #'요리개발실' '시료보관실' 등 이색 공간 #맞춤형 R&D로 170개국에 주방가전 수출
지난 6일 LG전자 경남 ‘창원연구개발(R&D)센터’ 14층 요리개발실. 이 회사 이고은 선임연구원이 이같이 말한 다음, 최근 미국에 출시한 ‘프로베이크 컨벡션(ProBake Convection)’ 오븐에서 구워낸 스테이크 한 덩이를 잘게 잘라 보여줬다. 고기의 겉과 속이 알맞게 익어 있었다. 한입 베어 물자 레스토랑에서 먹을 때처럼 부드럽고 진한 식감이 느껴졌다.
비결은 ‘수비드(sous-vide)’라는 프랑스풍 저온조리법. 일반 스테이크 조리법에선 섭씨 200~300도로 바짝 굽지만 수비드 조리법에선 55도로 장시간 조리한다. 밀폐된 비닐봉지에 음식물을 담아 미지근한 물 속에서 오래 익힌다. 그러면 겉과 속이 고르게 가열돼 본연의 맛과 향이 유지된다. 이 연구원은 “각종 조리기기가 완비된 요리 개발실에서 R&D 인력들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보면서 신제품에 탑재되는 레시피(조리법) 개발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말대로 요리개발실 안엔 화덕 외에도 오븐과 제빵기, 야외용 그릴 등이 가득 있었다. 이곳에서 연구원들은 조리법을 개발하고 신제품에 탑재할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 과정을 거듭한다. 수비드 조리법도 이렇게 해서 신제품에 적용할 수 있었다. 스테디셀러인 ‘디오스 광파오븐’에 탑재되는 조리법도 여기서 개발된다. 최신 디오스 광파오븐(ML32PW)은 쿠키·닭요리 같은 130개 조리법을 기본 탑재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깔면 총 272가지 요리를 할 수 있다.
조리법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단지 국내 소비자들의 까다로워진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해외 수많은 소비자의 다양한 입맛에 맞는 조리를 해주는 제품을 만들어야 수출에도 그만큼 탄력을 받을 수 있어서다. LG전자 주방가전은 세계 170개국에서 판매될 만큼 인기인데 선봉장인 오븐의 경우 중동 지역 수출용 제품엔 케밥 조리법을, 인도 지역 수출용 제품엔 카레 조리법을 탑재하는 식으로 ‘현지화’한 것이 주효했다.
LG전자가 2015년 연면적 5만1000㎡에 지상 20~지하 2층 규모로 착공, 지난달 문을 연 창원 R&D센터는 요리 개발실처럼 이색적인 공간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지하 1~2층은 여느 회사 건물들처럼 주차장이 아니다. 두 층 전체가 ‘시료(시제품·견본품)보관실’로 꾸며져 냉장고·오븐·식기세척기 등 750여 대의 주방가전이 자동차 대신 빼곡히 ‘주차’돼 있다. 예컨대 김치냉장고라면 양문형·스탠드형 등 종류별로 있어 어떤 R&D에든 간편히 활용할 수 있다. 권오민 선임연구원은 “각 분야 연구원들이 사무실에서 수시로 오가면서 공유와 협업을 할 수 있다”며 “연구원들이 도서관처럼 여기고 있다”고 했다.
이번엔 4층 ‘3차원(3D)프린터실’에 가봤다. 8억원짜리 미국산 ‘Fortus 900mc’ 등 총 4대의 첨단 3D프린터가 부지런히 로봇 팔을 움직여가며 시제품 모형을 생산 중이었다. 냉장고의 문 같은 큰 부품 모형도 설계한 대로 오차 없이 정교하게 만들어낸다. 3D프린터 도입 전보다 시제품 제작에 걸리는 시간이 30% 단축됐고, 비용도 연간 약 7억원씩 절감되는 효과를 얻고 있다.
LG전자는 R&D 인력의 전문성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연구원 개개인의 역량이 소비자 혜택으로 직결된다는 판단에서다. 이병기 선임연구원은 한국에 100여 명만 있다는 ‘워터 소믈리에’다. 일반 소믈리에가 와인 맛을 감별하듯 눈 감고도 물맛을 가려낸다. 그는 “2013년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운영하는 워터 소믈리에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했다”며 “정수기 개발 과정에서 물맛에 이상이 없는지, 어떻게 해야 더 물맛이 좋은 정수기를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한다”고 했다. 이 밖에 김치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김치 연구가’ 등 약 1500명의 R&D 인력이 근무 중이다.
송대현 LG전자 H&A사업본부장(사장)은 “창원R&D센터는 연간 1250억 달러 규모의 세계 주방가전 시장을 공략하는 전진 기지이자 LG전자 모든 주방가전의 산실”이라며 “창원공장도 2023년까지 스마트팩토리로 탈바꿈해 시너지를 도모하고 생산성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