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정권은 바꿨지만 국정감사는 바뀌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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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만 있고 대안은 없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지난달 31일 끝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국정감사를 두고 하는 얘기다. 헌법 제61조 1항에 따르면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거나 특정한 국정사안에 대하여 조사할 수 있으며, 이에 필요한 서류의 제출 또는 증인의 출석과 증언이나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국감의 제1목표로 정부 실책을 바로잡고 낭비되는 세금을 감시할 것이 명시돼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걷어내자며 과거청산 드라이브에 몰두했고, 야당은 현 정부의 인사 문제와 각종 정책을 두고 ‘신적폐’라 규정하며 역공에 나섰다.

국감 부활 30년, 구태 여전 #정치권 적폐 공방에 모습 감춘 정책질의 #관료사회 적폐 파헤치는 대신 정쟁만

그러다보니 정작 국감에서 파헤쳐야 할 관료사회의 적폐는 가려졌다. 지난달 13일 환경부 국감에선 ‘단체사진 비용 840만원, 3시간 회의에 1억원 소요’ 등의 문제가 나왔고, 24일엔 한국수력원자력이 골프장 건립에 157억원을 썼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주요 이슈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동안 정치권은 정쟁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30일 오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외교부 등에 대한 종합 국정감사에서 국정감사를 보이콧 중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자리가 빈자리로 남아 있다. [연합뉴스]

30일 오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외교부 등에 대한 종합 국정감사에서 국정감사를 보이콧 중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자리가 빈자리로 남아 있다. [연합뉴스]

9년 만에 야당이 돼 국감의 주인공으로 돋보일 수 있었던 한국당은 26일 방문진 이사 선임 문제에 반발하며 국감 보이콧을 선언하고 4일간 불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당은 지난해에도 김재수 당시 농축산부 장관 해임안 파동에 보이콧을 선언하고 열흘 가까이 국감에 불참했다.

적폐 드라이브에 골몰한 민주당도 고성과 막말이라는 국감 단골 장면을 연출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13일 문화체육관광부 국감에선 여당 위원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여론조사 설문지를 두고 ‘(박근혜 정부의) 차떼기 여론조작’이라는 집단성명을 내 야당과 ‘네 탓’ 공방을 벌인 탓에 정책질의가 1시간 35분 가까이 지연됐다. 13개 국회 상임위 중 법안처리 실적이 가장 저조해 ‘식물 상임위’라 불리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감장에서도 제대로 된 질의는 없었다. 27일 고영주 이사장이 점심시간에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것을 두고 민주당에서 “부적절한 처신”이란 지적이 나오자 고 이사장은 “무엇이 잘못이냐”고 받아쳤다. 31일엔 한국당이 이에 사과를 요청했지만 민주당이 거부했고, 시작 20분 만에 국감이 중단됐다.

30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간사가 야당측의 의사진행발언이 계속되자 감사장을 잠시 떠나고 있다.   이날 과방위는 신상진(자유한국당) 위원장 복귀전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간사 주재로 종합감사가 개회됐다며 잠시 정회 소동을 겪었다. [연합뉴스]

30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간사가 야당측의 의사진행발언이 계속되자 감사장을 잠시 떠나고 있다. 이날 과방위는 신상진(자유한국당) 위원장 복귀전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간사 주재로 종합감사가 개회됐다며 잠시 정회 소동을 겪었다. [연합뉴스]

공교롭게도 올해는 유신헌법으로 맥이 끊겼던 국감제도가 부활한지 30년째 되는 해다. 1949년 최초로 실시된 국감은 72년 10월 유신헌법 발효로 사라졌다가 16년만인 88년 재개된 뒤 30년이 흐른 것이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탄생한 국감에서 정치권은 여전히 소득 없는 정쟁에 집중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성장했지만 정치권은 그만큼 성장하지 않았다.

김록환 기자 roka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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