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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제 역할 못해 시민들 광장 나가 … 정치가 각성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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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에 몸 담았던 유인태 전 정무수석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8월 17일) 기자회견을 돌이켜 보면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협치’를 강조했으면 했는데 그 얘기가 없었다”면서다. 유 전 수석은 27일 통화에서 “어떤 지도자든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좀 위험하다”며 “우리는 대의 민주제를 채택한 국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인구 5000만이 직접 민주주의 방식을 계속 요구하면 (국정이) 과연 잘 운영될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원로 7인의 제언 #촛불, 직접 민주주의 실험 … 왜곡 위험 #대의 민주주의, 절충 가능한 게 장점 #국회 제 기능 위해 선거구제 개편을 #적폐청산, 과격하면 실패하기 마련 #단죄가 왜 나쁘냐 하는 건 아마추어

원로 7인의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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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 조화 필요”=촛불집회가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이긴 했지만 중앙일보가 인터뷰한 정계 원로들은 “촛불정신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양 날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인구 10만 도시였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도 직접 민주주의는 잘 안 됐다”며 “직접 민주주의도 왜곡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수석은 “국회라는 대의 민주제는 예스·노 외에 여러 가지 절충이 가능하다”며 “그게 대의(代議) 민주주의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유 전 수석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와 관련, “숙의 민주주의를 통한 공론화는 상당히 의미 있고 중요한 실험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런 뒤 “원전 건설 재개 여부를 국회에 맡겨 놨더라면 당론에 얽매여 이번처럼 우리 사회가 승복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했겠는가. 국회의원 300명이 지지고 볶든 해서 갈등을 해결하라고 국회를 만들어 놓은 건데, 국회의원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정대철 국민의당 상임고문도 “광장에 촛불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건 정권을 견제·감시해야 할 입법부가 제 기능을 못했기 때문”이라며 "정당정치의 복원, 국민 대의기관의 각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제 간의 절충을 강조했다. 박 전 의장은 "A방향과 B방향 등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절충점을 찾는 게 협치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조광조 개혁이 실패한 이유 헤아려야”=원로 7인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드라이브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이 전 수석은 "조선시대 조광조의 개혁이 왜 오래가지 못했는가. 개혁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개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 때 급진 개혁을 주도하다 중종과의 갈등 끝에 사약을 받고 숨졌다. 이 전 수석은 "적폐 청산은 특정 시점에 요란하게 할 게 아니라 부단히, 조용하게 하는 것”이라며 "집권세력이 먼저 자신의 썩은 살부터 도려내야 설득력을 얻는다”고 강조했다.

유 전 수석도 "역사를 보면 개혁 이후 늘 반동이 뒤따랐다”며 "촛불정신 구현에 있어서 뭐든지 너무 서두르거나 과격하게 하려다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 전 의장은 "개혁 대상과 여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치밀한 계산 없이 ‘잘못한 거 처벌하는 게 뭐가 나쁘냐’는 건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비판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국민 분열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일이 우선 과제”라고 했고, 정 고문도 "적폐 청산이 정치 보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면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과연 태극기집회의 요구들이 촛불정신과 서로 용해될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가 있다”며 "원칙 없는 타협, 적당한 타협으로 끌고 나간다면 촛불의 본래 뜻이 살아나는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했다. 다만 임 전 의장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과 새로운 질서 형성 과정이 혼재돼 있다 보니 여러 가지 한계나 여의치 않은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목표나 이상만 앞세울 게 아니라 현실적 대책을 찾아나가는 전술, 슬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 멘토인 송기인 신부는 "오른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왼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국민”이라며 "그걸 다 안고 가는 게 지도자고 정부”라고 말했다. 송 신부는 "촛불은 든 시민들의 바람은 단순히 정권을 바꾸고 누구에게 보복을 하자는 게 아니다”며 "좀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성숙하자는 뜻이었다”고 했다. 그는 "적폐를 저질렀던 사람도, 적폐 청산을 하자는 사람도 다 인격체인 만큼 서로 참아 주고 기다려 주는 아량이 필요하다”며 "잘못해서 적폐가 쌓였다면 그 사람들도 자숙해야 하는 게 도리”라고 말했다.

◆"정치 제 역할하려면 소선거구제 개편을”=유 전 수석은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하려면 현행 선거제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전 수석은 "현행(1구 1인 선출의) 소선거구제하에서는 좌우 양 극단의 표까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소선거구제로 등장하기 쉬운) 양당제하에서는 양 극단의 힘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선거제를 다원화된 현대사회에 맞게 진보·중도진보·중도보수·보수 등이 진출할 수 있도록 다당제화하면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구·박성훈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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